생각 이전의 존재에 대한 성찰
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
"사람들 속에 집을 지었으되, 수레와 말의 소란이 없고, 그 까닭을 묻자, 마음이 멀어지면 거처 또한 저절로 고요해진다고 한다"
도연명이 말한 이 마음이 멀어짐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의식이 생각과 동일시되지 않는 깊이, 존재가 스스로에게로 돌아간 자리다. 소란스러운 세상은 그대로 있으되, 세계를 경험하는 중심이 바뀌는 순간이다. 이 고요의 자리는 도연명의 시에서만 노래된 것이 아니다. 에카르트 톨레가 <지금의 힘>에서 말한 공간, 명상에서 말하는 생각과 생각 사이의 무념, 그리고 성경의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시편 46-10)”이 가리키는 곳 역시 정확히 이 침묵의 공간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톨레가 말한 공간은 생각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생각이 떠오르고 사라지는 배경이다. 명상에서 생각의 소멸을 훈련한다는 말도, 생각을 제거하거나 부정하라는 뜻이 아니다. 생각을 나로 착각하는 오래된 습관이 느슨해질 때, 생각 사이에 늘 이미 존재하던 침묵의 공간이 드러난다. 그 침묵은 공허가 아니라 충만이며, 무가 아니라 근원이다. 다만, 생각 구름이 걷히면 걷힐수록 그 공간은 커진다.
Joel Goldsmith가 “Be still”을 ‘고요하라’고 해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요하라는 말은 행동을 멈추라는 도덕적 명령이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조급한 태도, 의심과 확신을 끝없이 생산하는 마음의 소음을 잠시 내려놓으라는 명령이다. 고요해질 때 비로소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 이 앎은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사건이다.
내면의 존재를 기억해 내는 과정에서 수행자의 태도는 싸우는 자가 아니라 바라보는 자다. 떠오르는 모든 생각, 신념, 가치관, 의심, 심지어 에고라는 가상의 나마저도 구름처럼 흘려보낸다. 구름은 하늘을 해치지 않는다. 생각도 의식을 더럽히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나라고 붙잡을 때만 혼탁이 생긴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 신념과 세계관을 폭풍우 치는 바다 위의 등대에서 바라보라는 말이 있다. 바다는 요동치지만 등대는 흔들리지 않는다. 파도는 마음이 만든 생각의 내용이고, 등대는 의식 그 자체다.
이 구분이 깊어지면, 에고는 더 이상 주인이 아니다. 그것은 태양이나 달처럼 의식 안에 떠오르는 하나의 현상으로 분리된다. 에고를 제거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에고를 강화한다. 그러나 에고를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을 때, 에고는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그 순간 드러나는 것은 진짜 나인, 그동안 잃어버린 순수의식이다. 그리고 생각을 만들어내는 마음과 에고가 진짜 내가 아님을 알게 된다. 진짜 나는 모든 생각을 바라보고 있는 의식이며, 마음을 담고 있는 하늘이다. 구름이 걷혀야만, 진짜 나인 하늘이 보인다.
이 순수의식은 진아, 영, 우주의식, 심지어, 신,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형상이나 인격이 아니다. 마음속 하늘과 같은 빈 공간이다. 빈 공간이기에 모든 것이 나타날 수 있고, 비어 있기에 아무것에도 갇히지 않는다. 하늘에 구름이 모두 사라질 때 하늘이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하늘이 드러나듯이, 생각과 내면의 소음이 가라앉을 때 우리 안에 내재한 신성의 진면목이 분명해진다.
우리를 가리는 것은 외부의 소음이 아니다. 진짜 소음은 내면에서 끊임없이 작동하는 해석과 판단, 미래와 과거를 오가는 마음의 파동이다. 이 파동이 잦아들 때, 우리는 다시 우주의식과 공명한다. 그때 나는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전체가 자신을 알아차리는 하나의 창이 된다.
도연명 시의 '심원지자편'은 바로 이 상태를 가리킨다. 마음이 근원으로 멀어지면, 장소는 저절로 고요해진다. 삶의 조건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삶을 비추는 중심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말의 실존적 의미와도 연결된다. 완전하고 풍요로운 신은 저 멀리 있는 대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실재하는 존재로서의 언제나 나와 함께 있다.
그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는 말은 종교적 선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분리의 환상이 사라진 의식의 고백으로 여겨진다. 길은 따로 있지 않고, 진리는 설명이 아니며, 생명은 소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존재의 방식이다.
이 모든 표현은 하나의 진실을 다른 방향에서 비춘다. 신과 나, 의식과 세계, 하늘과 구름은 둘이 아니다. 생각이 잠잠해질수록 우리는 무엇이 되어야 할지를 묻지 않게 된다. 대신 이미 무엇이었는지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말이 아니라, 도연명의 시처럼 조용한 고요로 우리 안에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