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할까. 혹시 시작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착각은 아닐까. 우리가 알고 느끼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어떤 절대자의 설계에 따른 섭리라면, 그리고 그 모든 경험을 나라는 고정된 주체가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 설계자가 자신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면, 나는 과연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거부할 수 있을까. 자유의지라는 말은 이 질문 앞에서 갑자기 허공에 뜬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며, 우리가 자유롭다고 느끼는 이유는 원인을 알지 못한 채 결과만을 경험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돌이 공중에 던져진 뒤, 자신이 스스로 날아가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이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착각이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생각과 감정, 판단과 선택 역시 끝없는 인과의 사슬 속에서 발생한 필연적 결과일 뿐이다. 단지 우리는 그 복잡한 원인 구조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선택했다고 믿는다.
불교에서는 이를 더욱 급진적으로 해석하여, 애초에 나라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온, 즉 색, 수, 상, 행, 식이 잠시 결합하여 만들어낸 흐름을 자아라고 착각할 뿐, 고정된 주체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오온은 나라고 느끼는 존재가 실제로는 몸, 감각, 인식, 반응, 의식이라는 다섯 가지 과정의 잠시 모인 흐름일 뿐, 고정된 자아는 없다는 뜻이다. 즉, 나는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현상일 뿐이다. 이 관점에서 나라는 환상을 내려놓음(surrender)이나 흐름에 개입하지 않음(non-resistance)이라는 태도는, 나라는 독립적 존재가 내려놓는 선택이 아니라, 실체 없는 흐름이 스스로를 통과시키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려놓음조차 누가 하는 것일까. 행위자는 없고, 다만 행위만이 남는다.
영화 속 등장인물은 선택하고 고뇌하며 결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미 기록된 필름이 빛에 의해 투사될 뿐이다. 우리가 느끼는 삶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고통, 두려움, 사랑, 갈망, 회한은 우주라는 스크린 위에 투사된 하나의 장면이며, 그것을 실재라 믿는 순간 우리는 이야기 속 인물이 된다. 더 신비로운 것은, 만약 절대자가 존재한다면, 그는 자신이 만든 이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를 잊고, 스스로를 속이며, 인간이라는 가면을 쓰고 자신의 드라마를 관람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힌두 철학에서 말하는 리라, 즉 신의 놀이와 닮아 있다. 우주는 절대자가 자신을 숨긴 채 스스로를 경험하는 거대한 무대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애매함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고, 강물에 떠내려가는 낙엽처럼 흘러가야 할까.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의 역설이 나타난다. 의도하지 않겠다는 의도, 흘러가겠다는 선택 역시, 또 하나의 선택이라는 점이다. 도망칠 곳이 없다. 의지를 부정하려는 의지, 자유를 거부하려는 자유, 내려놓음을 선택하는 주체, 이 모든 것은 모순이다. 이 무한한 자기모순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만들어낸다.
뇌는 이 드라마의 핵심 장치다. 눈을 뜨면 외부 세계의 자극에 반응하고, 눈을 감으면 기억과 상상의 이미지에 반응한다. 평가하고, 비교하고, 예측하고, 선호를 표시하며,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한다. 멈출 수 없다. 이 반응성은 생존을 위한 진화의 산물이겠지만, 동시에 인간을 괴롭히는 고통의 근원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싶어진다. 그러나 몸은 움직이지 않으면 병들고, 생각은 차단하려 할수록 더욱 거세진다. 침묵 속에서도 기억과 상상은 쉼 없이 떠오른다. 마치 출구 없는 미로처럼, 우리는 의식의 내부에 갇혀 있다.
이때 질문은 더욱 깊어진다. 도대체 반응하고 있는 이 존재는 누구인가. 생각을 보고 있는 것은 또 무엇인가.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했지만, 동양의 수행자들은 오히려 이렇게 되묻는다. “그 생각을 보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생각이 있다면, 그것을 인식하는 또 다른 차원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또한 포착하려는 순간, 하나의 생각으로 변한다. 이 끝없는 되물음 속에서 나는 점점 희미해지고, 결국 남는 것은 오직 알아차림 그 자체, 혹은 텅 빈 의식의 장뿐이다.
이 상황에서 실존의 환상이라는 개념이 떠오른다. 우리는 스스로를 하나의 고정된 존재, 연속된 이야기, 일관된 자아로 느끼지만, 실제로는 순간순간 생성되고 소멸하는 경험들의 흐름일 뿐이다. 이름, 성격, 기억, 가치관, 인생사라는 것은 이 흐름 위에 덧씌운 이야기 구조일 뿐이다. 한 살 때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고, 죽기 직전의 당신은 지금 어디에 숨어있나. 이 이야기 구조 덕분에 우리는 사회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지만, 동시에 이 구조에 집착하는 만큼 고통도 깊어진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는 환상인가. 혹은 실존 자체가 환상인가. 어쩌면 자유의지란 절대적 자율성이 아니라, 꿈이라는 흐름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다시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이미 주어진 프로그램을 따르는 로봇이 아니라, 자신의 코드 일부를 수정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한다. 완전한 자유는 없지만, 완전한 결정론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한다. 이때 자유란 선택의 절대성이 아니라, 패턴을 인식하고, 그것을 변형할 수 있는 가능성의 여지일 것이다.
결국 인간은 신이 자신을 경험하기 위해 만든 하나의 창, 혹은 우주가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일지도 모른다. 그 거울 속에서 우리는 고통받고, 사랑하고, 질문하고, 절망하며, 다시 깨어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어쩌면 거대한 착각이자, 동시에 가장 깊은 진실일지도 모른다. 환상이 없다면 실존도 없고, 실존이 없다면 깨달음도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자신이 환상임을 알아차리는 순간조차 하나의 장면으로 끌어안는 끝없는 자기 연출의 연속이다.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할까. 어쩌면 시작도 끝도 없다. 다만 이 순간, 생각이 떠오르고, 그것을 바라보는 무엇이 있으며, 그 사이에서 삶이라는 장면이 조용히 흘러갈 뿐이다. 그리고 그 흐름 자체가, 우리가 나라고 부르던 것의 가장 가까운 실체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