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사상가들, 이를테면 르네 데카르트나 조지 버클리, 그리고 동양에서는 라마나 마하리시와 같은 이들이 현실과 자아, 죽음의 실재성에 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의문을 제기해왔다. 어떤 이는 모든 것이 의식의 산물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꿈과 같다고 말한다. 그들은 각자의 논리와 통찰로 세계의 기반을 흔들어 놓는다.
그러나 그 모든 사유의 파도 위에서 우리는 여전히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하루를 살아간다. 그리고 그 순간, 음식이 입안에서 퍼질 때의 따뜻함과 만족감은 어떤 이론보다 직접적이고 선명하다. 그것이 설령 꿈속의 감각이라 할지라도, 그 느낌이 주는 기쁨은 결코 희미하지 않다. 꿈속에서 느끼는 감정이 실제와 다르지 않듯이, 우리가 지금 이 순간 느끼는 만족 또한 부정하기 어려운 하나의 경험적 진실이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이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세계가 실재하든, 의식의 투영이든, 혹은 다중우주나 블록우주와 같은 거대한 구조 속의 한 단면이든 간에,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는 즉각적인 변화가 없다. 배가 고프면 먹고 싶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쁘며, 슬픔이 오면 눈물이 흐른다. 이러한 반응들은 철학적 가설과는 별개로, 지금 이 자리에서 반복되는 삶의 실제 상황이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역설이 드러난다. 장자의 말처럼 현실이 꿈이라면, 우리는 꿈속에서도 진지하게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진지함은 허상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존재의 본질이 무엇이든 간에, 느낌은 그 자체로 하나의 현실이다. 맛있다는 감각, 편안함, 기쁨과 같은 것들은 존재론적 확실성보다 더 가까운 차원에서 우리를 붙잡는다.
죽음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언젠가 이 몸과 마음이라는 옷을 벗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미래의 순간을 지금 이 자리에서 미리 반복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아직 도달하지 않은 지점을 미리 끌어와 현재를 흐리게 하기보다는, 그때가 되었을 때 맞이하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삶은 언제나 현재형으로만 경험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대한 우주론과 형이상학의 한가운데에 서 있으면서도, 동시에 아주 단순한 존재로 살아간다. 우리는 생각할 수 있지만, 동시에 느끼고 먹고 웃고 울어야 하는 존재다. 그리고 어쩌면 이 단순함 속에 하나의 지혜가 숨어 있다. 세계의 궁극적 본질을 규명하려는 노력과 별개로, 지금 이 순간의 경험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태도 말이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설령 이 삶이 하나의 꿈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 꿈을 살아내는 존재이며, 그 안에서 느끼는 기쁨과 만족은 결코 무가치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세계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 세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무엇을 느끼며, 어떤 순간을 진실하게 받아들이는가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