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하늘과 먹구름

by 임풍

빙산의 일각이라는 표현을 들으면, 이는 삶과 죽음의 본질을 상징하고 있는 것 같다. 수면 하 거대한 얼음산의 뿌리가 있고, 수면 위에는 단지 아주 조그만 조각이 드러나 있다. 마찬가지로 죽음의 표면에 삶이 드러난다는 관점은, 생을 긍정하거나 죽음을 부정하는 양극단 사이에 있지 않다. 그것은 존재의 깊은 구조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삶은 늘 앞면처럼 드러나 있고 죽음은 뒷면처럼 숨어 있지만, 두 면은 결코 분리된 적이 없다. 오히려 죽음이 배경이기 때문에 삶은 선명하고, 죽음이 한 걸음 뒤에서 따라오기 때문에 인간은 순간을 살아낸다.

젊은 시절에는 누구나 삶의 앞면만 보며 달린다. 성취와 욕망이 동력이고, 미래가 무한히 확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그 모든 것은 서서히 힘을 잃고, 인간은 자신이 붙잡고 있던 것들의 허망함을 비로소 깨닫기 시작한다. 많은 노인들이 “세상이 허무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체념이 아니라, 삶을 긴 궤적 속에서 바라본 뒤 얻는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삶의 앞면만 보던 시야가 뒤집히며, 그림자처럼 따라오던 뒷면의 죽음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허무의 감각은 부정적 가치가 아니다. 오히려 삶의 구조를 더 깊이 이해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투명성이다. 젊은 날에 미리 이 경계를 이해하는 사람은, 인생 후반부에 갑작스럽게 허무에 빠지지 않는다. 그 사람은 세월이 지나면서 무너져 가는 집을 바라보는 대신, 애초부터 집의 가장자리가 원래부터 허물어진 공간이었음을 안다. 이러한 통찰은 삶의 무게를 줄이고, 고통의 의미를 바꾸며, 불필요한 욕망의 환상을 벗겨낸다.

삶의 뒷면을 구성하는 죽음은 공포가 아니라 조건이다. 죽음이 없다면 인간은 감정과 의미를 갖지 못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육체라면 인간은 욕망을 가질 필요가 없고, 책임도 없으며, 매 순간을 진지하게 대할 이유도 없다. 그런 존재는 원자력시계나 행성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단지 작동할 뿐이며, 반복되는 움직임을 영원히 되풀이할 뿐이다. 인간의 감정, 사랑, 결단, 후회, 용서, 책임과 같은 모든 정신적 구조는 죽음을 향해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 위에서만 유효하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시간은 방향을 가지며, 삶은 유한하기 때문에 한순간이 빛을 갖는다.

죽음을 미리 의식하는 삶은 비관도 체념도 아니다. 오히려 삶을 끝까지 부드럽게 붙들고, 한 걸음 한 걸음 책임 있게 살아가게 하는 규율이다. 죽음이 언제나 뒤에서 따라온다는 사실은, 지금 살아 있는 모든 행동을 과장 없이 진실하게 만든다. 허상은 힘을 잃고, 과한 욕망은 정제되며, 실천은 명료해진다. 죽음을 잊지 않는다는 것은 생을 얕게 보는 것이 아니라, 생을 허상에서 떼어내고 본질 그대로 바라보는 일이다.

죽음을 찬미하는 것도 아니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다. 죽음이 삶을 파괴하는 힘이라면 삶은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고, 죽음이 삶의 반대쪽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삶은 늘 불안 속에서 흔들릴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삶의 표면 아래 흐르는 바탕으로 볼 때, 인간은 비로소 존재의 한 덩어리를 전체로서 이해하게 된다.

삶은 죽음 때문에 살아 있고, 죽음은 삶 때문에 드러난다. 두 개의 다른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가 밝음과 어둠이라는 두 얼굴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인식을 얻은 사람은 삶의 표면만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표면 뒤의 그림자까지 함께 바라본다. 그 그림자는 그를 두렵게 하지 않고, 오히려 삶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손처럼 작용한다. 죽음이 기다리기에 삶은 살아 있고, 죽음이 예정되어 있기에 인간은 매일을 완성하려 한다. 이 단순한 진실이야말로, 삶을 허무에서 구해내고, 죽음을 공포에서 해방시키는 철학적 깨달음의 중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