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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어디서 오는가

이성 이후, 신학의 조용한 귀환

by Wooin


밤이었다. 문명이 불을 켠 순간, 어둠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고 정교한 그림자가 인간의 발치에 들러붙었다. 모든 것이 환해진 듯 보였지만, 그 빛은 본래의 태양이 아니라 스스로를 등진 채 만든 조명의 역설이었다. 이성의 이름으로 터를 잡은 세계는 더 이상 신을 부르지 않았다. 대신 진보와 과학, 자본과 권력이 신의 자리를 대신했으며, 신학은 그 주변을 배회하는 잔여 언어로 밀려났다.


근대의 이성은 마치 정오의 햇빛처럼 모든 것을 드러내려 했지만, 그 강박은 결국 세계를 말라가게 만들었다. 바르트(Karl Barth)는 이 해갈 없는 세계에 계시라는 빗줄기를 다시 불러오려 했고,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그 마른 땅에 희망이라는 씨앗을 심었다. 그러나 여전히 무언가는 부족했다. 신은 고요한 초월이 아니었고, 인간은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었다. 세계는 텅 빈 무대가 아니었고, 시간은 직선으로만 흐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신학은 다시, 아름다움에서 길을 묻는다.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a)는 이성으로부터 침식된 신학의 무게를 '영광의 형상' 속에서 다시 부활시키려 한다. 그는 진리를 증명할 수 없는 명제의 체계가 아니라, 감각적 아름다움에 스며드는 현존의 방식으로 제시한다. 그의 신학은 말보다 형상에 가깝고, 개념보다 연주에 닿아 있다. 신은 존재한다기보다, 나타난다. 마치 현악기 줄 사이로 스며드는 음처럼. 발타사르에게서 신학은 다시 하나의 장르가 된다. 침묵과 음악, 드라마와 색채가 복잡하게 얽힌 영적 무대. 그 무대 위에서 신은 사라지지 않고, 다만 숨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숨어 있음의 방식이 곧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발타사르의 미학조차, 여전히 경계 너머를 묻는 요청 앞에서는 머뭇댄다. 고통받는 몸, 파괴되는 생태, 지워진 젠더와 억압된 타자 앞에서, 초월의 형상은 충분한 응답이 될 수 있을까. 바로 이 틈에서 켈러(Catherine Keller)는 말한다. 신은 세계의 밖이 아니라 움직이는 흐름 속에 있다고. 그녀는 신학을 고정된 교리의 골격이 아니라 과정의 리듬, 시간 속에 울리는 ‘관계의 음계’로 다시 부른다. 켈러의 과정신학은 물과 같다. 단단하지 않지만 무너지지 않으며, 스스로를 흘려 타자의 고통을 채운다. 켈러는 삼위일체를 정적 구조가 아니라 "생성하는 사건의 장(場)"으로 본다. 존재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다른 존재들과 얽혀 있으며, 신의 행위 또한 그 얽힘의 진동 속에서 울린다.



이 시대, 신학은 더 이상 대답을 요구받지 않는다.

오히려 묻는 자의 윤리, 귀 기울이는 자의 미학으로서 자신을 재정립한다.

이제 신학은 질문을 바꾼다. '신은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신은 어떻게 관계하는가?'로.



발타사르가 무대를 만들고, 켈러가 그 무대에 흐름을 더한다면,

신학은 더 이상 사제들의 언어가 아니라,

시인들의 음성, 무용수의 제스처, 혹은 상처받은 타자의 속삭임으로 변주된다.



이성의 강철빛 조명이 꺼진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묻는다.

빛은 어디서 오는가.

언어가 되기 전의 감각, 의미를 이루기 전의 몸짓으로 먼저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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