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같다는 거짓말1- 재판정에 커다란 벽이 세워졌다.

도경은 새벽 공기를 가르며 차가운 운전대를 잡았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온통 잿빛이었다. 지독했던 겨울이 물러가나 싶더니, 그 자리를 메운 것은 봄의 생동감이 아닌 숨을 턱 막히게 하는 황사와 미세먼지의 소용돌이였다. 뿌연 시야 사이로 점멸하는 신호등을 보며 도경은 나직이 읊조렸다.


"참 부지런도 하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타박이 차 안의 정적을 흔들었다.


어제 자정을 넘겨 사무실 불을 끄고 나올 때만 해도 몸은 감각이 없었다. 하지만 아침이 되자 정직하게도 통증이 찾아왔다. 허리를 끊어낼 듯한 고통에 신음하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독한 진통제 두 알을 삼키고, 화끈거리는 파스를 허리춤에 덕지덕지 붙인 채 책상 앞에 앉았다. 의자 시트에 몸을 기대는 것조차 도전이었지만, 도경은 다시 펜을 잡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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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로 산 지 여러 해였다. 수많은 서면을 쓰고 법정을 드나들었지만, 판사의 무심한 '박대'와 차가운 '거절'만큼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가시 같았다. 오늘도 두툼한 기록을 넘기며 증거신청서를 작성하고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비관적인 예감이 독버섯처럼 피어올랐다. '이번에도 채택되지 않겠지.' 하지만 도경은 멈출 수 없었다. 그것이 벼랑 끝에 선 의뢰인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은 명백히 승패를 가를 결정적인 증거를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 철벽 같은 침묵을 깨기 위해 필요한 절차가 바로 문서제출명령신청이었다. 우리 법은 설령 증거를 직접 손에 쥐고 있지 못하더라도, 공정한 재판을 위해 필요한 자료라면 법원의 명령을 통해 제출받을 권리를 분명히 보장하고 있다는 것이, 도경에게는 굉장히 위선처럼 느껴졌다.


도경은 텅 빈 사무실에서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법관들은 왜 그토록 증거신청의 채택 꺼려하는 것일까.' 씁쓸한 가설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증거가 회신되어 기록이 산더미처럼 불어나면, 그만큼 검토해야 할 서류가 많아지고 판결문을 쓰는 시간도 길어질 터였다. 결국 '효율'과 '속도'라는 명분 아래 사건의 진실이 번거로운 짐짝 취급을 당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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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에서 패소의 쓴맛을 보고 뒤늦게 도경을 찾아온 의뢰인들의 기록은 처참했다. 당사자가 직접 소송을 수행하며 '몰라서' 혹은 '방법을 몰라' 신청조차 못한 증거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사실관계에 대한 판단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2심에서, 도경은 필사적으로 쟁점마다 증거의 그물을 쳤다. 문서제출명령부터 과세정보제출명령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진실의 파편을 수집하려 애썼다 (민사소송법 제272조, 제294조).


"나만 유별난 것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도경을 덮쳤다. 이렇게 세세하게 증거를 따지고 드는 변호사가 드물어서 법관들도 이 절차를 낯선 이물질처럼 느끼는 것일까.


현재 우리나라 소송 구조에서 증거신청의 채택 여부는 전적으로 법관의 재량에 달려 있다. 도경은 이 '재량'이라는 단어가 때로 진실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처럼 느껴졌다. 결정적인 증거를 상대방이 은닉하고 있는데도 법원이 신청을 받아주지 않고, 정작 판결문에는 '달리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다'는 문구가 적히는 현실. 그것은 도경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합리가 결여된 모순의 극치였다.


동료 법조인들은, 혹은 이 시스템 안에 몸담은 다른 이들은 정말 이 거대한 부조리가 괜찮은 것일까. 증거를 내보지도 못한 채 패소할 수 있다는 이 잔인한 불확실성이 도경에게는 마치 깨지 않는 악몽처럼 느껴졌다.


*이 글은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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