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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우빈 . Apr 03. 2017

너에게로 가는 길

하남에서 파주까지 하루동안 걸어가다

3월 25일 토요일 동대문구민회관에서 '완벽한 공부법' 저자인 신영준 박사님과 고영성 작가님의 오프라인 강연을 들었다. 두 분은 청년들의 성장 멘토로서 좋은 학습법들을 많이 알려주시고 동기부여를 해주시는 고마운 분들이다. 두 분 때문에 바뀐, 바뀌고 있는 청년들이 많다. 그리고 나도 그분들처럼 남에게 영감을 주는 이로운 존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하고 살고 있고 실천하려고 한다. 첫 번째 시작으로 하남에서 파주까지의 도보여행을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강연에서 신영준 박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20대로 돌아간다면 하고 싶은 20가지를 알게 된 청년이 한강 길을 처음에서 끝까지 걸었다고 하네요. 점점 변하고 있는 친구들이 나오고 있어요. 혹시 이 자리에 있나요?"


손을 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신영준 박사님은 말을 이어갔다. 이번엔 독서 이야기가 나왔다. "여러분 독서 제대로 하시고 계시나요? 그런데 독서를 잘하고 계신다고 착각하는 분들도 많아요. 혹시 여기서 완벽한 공부법 챕터 중 2개 정도를 제가 있는 이 강단에 올라서 사람들 앞에서 설명할 수 있는 분들 있으신가요?"


아무도 손들지 않았다. 신영준 박사님의 말씀을 듣고 느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금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 제대로 생각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나도 물론 그렇다. 그래서 이번에 하남에서 파주까지 간 경험을 남들에게 소개해준다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내가 무대에 올라 많은 대중들에게 나의 경험을 전한다는 마음으로 적어봤다. 그 이야기를 소개한다.


0월 0일 / 00 회관 신영준 박사, 고영성 작가 특별 강연


신영준 박사 : 인생공부 구독자들이 많이 변하고 있어요. 이번에는 하남에서 파주까지 간 친구가 나왔는데요. 혹시 그 친구분 강연에 오셨나요? 우빈 씨


박우빈 : (손을 번쩍 든다)


신영준 박사 : 오 왔네요. 저 친구예요. 우빈 씨 잠깐 앞으로 나와봐요.


박우빈 : (앞으로 나온다)


신영준 박사 : 우빈 씨, 도보로 하남에서 파주까지 다녀오는 특별한 경험을 했잖아요? 그런 일을 왜 했는지 그리고 뭘 느꼈는지에 대해서 오늘 강연 온 분들께 설명해줄 수 있나요?


박우빈 : 네 알겠습니다.


신영준 박사 : 그럼 부탁드릴게요.


나만의 둘레길, 하남에서 파주까지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하남에 사는 28세 박우빈이라고 합니다. 저는 2017년 4월 1일에 하남에서 파주까지 걸어서 하루 만에 도착했는데요. 하남에서 파주까지의 거리는 60km입니다. 사실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도보로 세계여행을 하신 분들이 들으면 가소로우실 수도 있는 거리입니다. 하지만 저는 도보 여행을 하기 전보다 훨씬 성장했음을 느낍니다. 저만의 특별한 무기가 생겼다는 기분이랄까요?


제가 걷게 된 동기는 '영독공' 팟캐스트 때문입니다. 영독공 팟캐스트는 영어, 독서, 학습법 관련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방송이지요. 영독공에는 여러 가지 테마의 방송이 있는데 저는 인생공부라는 시리즈를 가장 좋아해서 첫 편부터 계속 듣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20대로 돌아간다면 하고 싶은 20가지'라는 제목의 방송을 듣게 되었어요.


20대로 돌아간다면 하고 싶은 20가지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신영준 박사님과 고영성 작가님이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당신이 20대에 하지 못해서 후회하는 것이 뭔가요?'라고 올렸고 2만 개의 댓글이 달렸어요. 그 후 신영준 박사님과 고영성 작가님은 2만 개의 후회 데이터로 20가지의 후회하지 않는 인사이트를 뽑아 내주셨는데요. 20대 후반인 저는 평소 두 분을 존경해왔고 2만 명의 데이터로 검증된 후회 이야기를 듣고 생각했습니다. '나도 후회하지 말고 한번 해보자!'라고 말이죠.


20대 후회 목록 첫 번째가 도보 여행이었습니다. 고영성 작가님은 신혼여행으로 산티아고 순례길(800km)을 걸었다고 합니다. 작가님은 길을 걸으면서 인생에 대한 전반적인 생각을 많이 하게 됐고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무엇이든지 꾸준히 하다 보면 결국에는 이룰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뿌듯하고 가슴이 두근거렸을까요?


저도 팟캐스트를 듣고 고영성 작가처럼 800km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습니다. 당장이라도 스페인 비행기표를 끊고 싶었지만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둬야 하는 등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어요. 그래서 거창하지는 않지만 제가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도보여행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는 하남에 삽니다. 그리고 여자 친구 집은 파주입니다. 누군가를 향해서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갈 때는 퇴근 후 여자 친구 직장이 있는 강남구청으로 지하철을 타고 갔는데 파주까지 걸어서 얼굴을 본다면 기분이 어떨까 상상을 해봤어요. 정말 반갑고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이런 생각에 하남에서 파주까지 네이버 지도로 길 찾기를 해봤어요. 도보는 8Km 이내만 보여준다고 나오더군요. 차선책으로 카카오 맵을 깔아서 길 찾기를 해봤습니다. 30Km 이내만 보여주더라고요. 하남에서 파주까지는 57.6km입니다. 카카오 맵으로는 가야 하는 경로를 한 번에 볼 수 없어서 중간 베이스캠프를 정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베이스캠프로 지정한 곳은 합정입니다. 합정은 제가 근무하는 회사입니다. 사람들은 하남에서 합정까지 출퇴근한다고 하면 거리가 있다고 힘들지 않냐고 물어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걸어서 가봤다고 말하면 얼마나 뿌듯할까요? 이런 생각도 제가 행동하게 된 계기 중에 하나입니다.


하남에서 합정까지는 29.7km입니다. 예상 소요 시간을 보니 7시간 12분이 걸리더라고요. 7시간 동안 걸어서 출근을 한 사람이 있을까요? 너무 해보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걷기로 결심했습니다. 20대의 소중한 시간이 가기 전에 의미 있는 경험을 하고 싶어서 도전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겨우 하남에서 파주까지 걸었다고 자랑질이야'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저에게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나만의 특별한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근무하는 회사를 거쳐서 여자 친구를 걸어서 만나는 저만의 유일한 경험 말이죠. 저의 특별한 장소와 특별한 사람을 특별한 방법으로 만난다면 특별한 경험으로 특별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사실 제가 인생에서 가장 많이 걸었던 기억은 2013년에 학군단 후보생 신분으로 하계 훈련을 갔을 때 60km 행군입니다. 40kg의 완전군장(공식적으로 그런데 아마 그것보다는 낮은 무게였을 것입니다)을 매고 걸었는데 발에 물집이 잡히고 못 걸을 정도의 고통이 있었다는 기억이 남아 있어요. 4년이 지난 지금은 60km를 걸었던 기억이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그때는 하기 싫어도 장교가 돼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인내하며 걸었죠.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해야 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도보 여행은 달랐습니다. 우선은 제가 원해서 하는 것이라 너무나 설레었어요. 반대로 걱정되는 것은 군대에서의 몸이 아닌 완전 민간인의 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걷기로 마음먹었죠.


떠나기 전 날 이것저것 계획을 적어놨습니다. '6시에 출발하면 휴식시간과 점심시간 2시간 포함해서 17시간 정도 걸리니 밤 11시에 도착한다. 그럼 여자 친구가 퇴근하고 파주에 오는 시간이니 만나서 고기를 먹으면 되겠다. 삼겹살 먹고 바로 찜질방에 가서 씻고 자야지. 잠자기 전에 핸드폰으로, 걸으며 느꼈던 감정을 좀 기록해놔야지. 그렇게 원기 회복하고 다시 하남으로 걸어서 돌아가야겠다.'라고요.


아버지 배낭을 빌려 짐도 쌌습니다. 휴대폰 충전기와 휴대용 배터리를 풀로 충전해놓고 챙겼으며 지갑과 여벌의 옷과 속옷을 챙겼어요. 칫솔도 넣고 이어폰도 챙겼습니다. 심심하면 인생공부 팟캐스트 들으려고요. 준비를 다하고 침대에 누웠습니다. 설레는 감정이 밀려와 잠을 쉽게 이루지 못했어요. 새벽 1시 정도에 잠이 들었고 다음날 5시에 일어났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어머니가 차려주신 쑥된장국에 밥을 먹었습니다. 식사 후 아메리카노 커피를 마시면서 오늘 떠날 일정을 페이스북에 기록했어요. 여기에 기록하면 다수가 보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포스팅을 한 뒤 출발했습니다. 2017년 4월 1일 오전 6시 22분에 첫걸음이 시작됐습니다.


아주 호기롭게 출발했습니다. 설레는 마음에 발걸음도 가벼웠지요. 걸어서 파주까지 간다고 생각하니 너무 신기하고 특별했습니다. 한동안은 그런 마음으로 계속 걸었습니다. 가면서 공사 중이라 막힌 길도 만나고 굴다리 밑 길도 지나가고 다리도 건너고 육교도 올라갔습니다. 아침부터 한강 공원에서 운동 중인 수많은 사람도 만나고 드론 공원에서 날아다니는 드론도 보면서 가슴이 뜨거워졌어요. '나도 나중에 여기에 와서 운동을 해봐야지. 드론을 날려봐야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에요. 도보 코스에는 어린이 대공원도 있더라고요. 어린이 대공원을 후문으로 들어가서 정문으로 나왔습니다. 대공원에서 배에 신호가 와서 급히 해결했어요. 걸어서 소화가 잘 된 것인지 아주 시원했습니다. 몸이 더 가벼워졌어요.


기쁜 마음으로 한참을 걷다가 왕십리역까지 왔습니다. 카카오 맵을 보면서 걸었고 2호선 길 따라 쭉 가서 중간 목적지인 합정에서 쉴 생각이었습니다. 길이 쉽다고 판단돼서 카카오 맵을 안 보고 2호선 길을 따라 걷고 있는데 길을 잘못 들어 1호선 방향으로 30분 정도 걸었습니다. 지도를 보니 가려던 목적지와 많이 벗어나 있어서 다시 돌아왔어요. 지금 가는 이 길이 맞는 길인지 주변 상황을 잘 파악하면서 걸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좋았던 것은 청계천에 있는 무학교라는 다리 위에서 깨끗한 물과 물고기를 봤어요. 투명한 물과 잠자는 듯 움직이지 않은 사람 팔뚝만 한 물고기를 보면서 '서울 중심에도 이처럼 맑은 물이 있구나'라고 생각했지요.


길을 걸으며 많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특히 군대에서 정훈장교로 근무할 때 실력과 경험이 없어 주변 사람을 불편하게 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앞으론 그렇게 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걸음을 옮겨갔어요. 한참을 걷고 명동 쪽으로 진입했는데 한 아주머니께서 제게 명동성당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 물어보셨습니다. 명동성당은 일부로 찾아서 가본 적이 없고 예전에 길을 가다가 우연히 본 건물이라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다시 길을 걸었어요. 그렇게 아주머니와 헤어지고 2분 정도를 걸었을까요? 명동대성당을 가려면 왼쪽으로 가라는 안내 팻말이 보였습니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주머니는 없었습니다. 그때 세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첫째, 내가 경험 없음으로 인해 저 아주머니는 더 시간과 노력을 들여 명동성당을 찾겠구나.

둘째, 내가 잘 모르더라도 지도 어플을 통해서 길을 알려드릴 수 있었을 텐데 내가 경솔했구나.

셋째, 다음에 누군가 나에게 길을 물어본다면 아는 길이라면 잘 설명하고 모르는 길이라면 지도 어플을 찾아 잘 설명해야겠다. 이렇게 세 가지를 생각했어요.


약간의 죄책감을 가지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시청이더군요. 시청을 지나갈 때는 경찰들과 탄핵반대 시위를 준비 중인 시위대를 보았습니다. 덕수궁을 지날 때에는 풍악을 올리는 조선시대 코스프레 공연을 잠시 지켜봤어요. '시청이란 공간은 참으로 복잡 미묘하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걸었습니다. 시위를 준비하는 박사모들과 우발사태를 대비하려고 인간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는 경찰들, 그 앞에서 제례 공연을 하고 있는 조선시대 복장을 한 사람들의 모습이 한데 어우러져 볼거리를 제공했습니다. 외국인들의 모습도 눈에 많이 뜨였는데 그들은 한국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계속 걸었습니다. 새마을호가 제가 걷는 경로를 차단하고 신나게 달리는 모습도 보았어요. 아현동 가구거리에서는 고객사 대표님에게 전화가 와서 급히 받았습니다. 보도자료를 써달라는 이야기였는데 언제까지 필요하시냐고 물어보니 다음 주에 천천히 써도 된다고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요. 저는 주말이어도 급하시면 써드리고 싶지만 파주로 도보여행 중이라 어렵겠다고 말씀드렸어요. 고객사 대표님은 웃으시며 잘 다녀오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합정에 점점 가까워졌음을 느꼈습니다. 홍익대가 보였여요. 홍대 예술의 거리에는 수많은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다 예쁘고 멋있게 꾸미고 친구들과 어울려서 놀고 있었습니다. 저는 운동복에 등산가방을 메고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갔습니다. 예전에 저였다면 창피해서 기죽었을 텐데 당당하게 어깨를 피고 걷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주말에 친구를 만나고 노는 일반적인 경험을 할 때 저는 저만의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엉뚱한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남루한 차림의 제가 잘 꾸며진 사람들 사이를 당당하게 지나가는 찰나의 사진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언젠가는 꼭 해봐야겠어요.


홍익대를 지나고 드디어 중간 목적지인 합정에 도착했습니다.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더군요. 6시 22분에 출발해서 12시 56분에 도착했으니 6시간 34분을 내리 걸은 것입니다. 갈증이 나 근처 편의점에서 초콜릿 우유를 사서 벌컥벌컥 들이켰어요. 다 마신 뒤 바로 옆 오리 고깃집에 가서 오리 훈제 정식을 흡입했습니다. 밥맛이 참 좋더군요. 다 먹고 시간을 보니 오후 1시 40분이었습니다. 땀으로 젖은 양말을 갈아 신고 좀 쉬어야겠다고 느껴서 제가 근무하는 회사 사무실로 갔습니다. 테이블에 누워서 좀 잤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어떤 할아버지였는데 청소를 하러 들어오셨더라고요. 주말에 쉬고 회사에 출근하면 항상 쓰레기통이 비워져 있었는데 이 분이 하셨던 일이더라고요.


1시간 정도의 꿀잠을 자고 일어나 봤습니다. 다리가 천근만근이었어요. 양발에 물집도 몇 개 잡혀서 그런지 따끔거리기도 하더라고요. 파주는 어찌어찌 가겠는데 다음날 왕복하기는 만만치 않겠다고 느꼈습니다. 그래도 처음에 하남에서 출발할 때 합정 도착 예정 소요 시간이 7시간 12분 정도 걸린다고 했는데 40분 일찍 도착했으니 내 걸음이 빠르구나 생각하고 자신감이 붙었었어요. 여자 친구가 퇴근해서 돌아오기 전에 먼저 파주에 도착할 것이라고 확신을 했지요. 여자 친구는 밤 11시쯤에 오니까 제가 오후 세시에 출발하면 밤 10시 정도는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너무 가볍게 생각한 거지요. 저는 제가 지치는 것은 고려하지 않고 도착 예정시간을 계산했습니다.


안일한 생각을 하고 오후 3시 21분에 합정에서 다시 출발했습니다.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날씨가 괜찮았는데 바람이 심하게 불고 먹구름이 잔뜩 드리워져 있었어요. 우산이 없어서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는 방향 쪽을 바라보니 저 멀리에는 먹구름이 없고 밝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어요. 비가 오기 전에 어서 파주 쪽으로 가야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발걸음을 좀 더 서둘렀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빗방울이 뚝뚝뚝 떨어졌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리 많이 오진 않아서 맞고 걸을만했어요. 맑은 하늘이 펼쳐져있는 파주 쪽으로 걸어서인지 비 맞는 양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비는 결국 그쳤는데 다리가 점점 아파오더라고요. 충전을 위해 상암 월드컵경기장 근처 쥬시에서 생과일(바나나) 주스를 마셨습니다. 보상을 주니 힘이 좀 나더라고요.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상암 월드컵경기장 밑 공원을 가로질르고 한참 걸으니 YTN 건물 앞에 아이돌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남자들이 보이더라고요. 관심이 별로 안 가서 뒷모습 사진을 한번 찍고 다시 목적지를 향해 걸었습니다. 저 멀리 고양시를 가리키는 팻말이 보였어요. 파주가 점점 가까워져 오는데 다리가 너무 아팠습니다. 근처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았어요. 다리를 쭉 펴고 양손으로 쓸어내리고 발바닥을 지압했습니다. 10분에서 20분 정도 쉬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쉬었다 걸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리가 저려오더라고요. 그렇지만 가야 했습니다. 여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죠.


여자 친구는 강남구청에서 일합니다. 웨딩사진작가를 하고 있는데 주말에는 거의 못 쉽니다. 평일에 날을 골라서 쉬어야 합니다. 파주에 살지만 근무지가 강남구청이라 아침 일찍 나가서 일을 하고 저녁 늦게 퇴근합니다. 일도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는 일이라 활동량이 어마어마합니다.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와요. 지하철이 붐비면 하루 종일 서서 출퇴근을 합니다. 일이면 일, 이동이면 이동, 뭐하나 편하지 않습니다. 그런 여자 친구가 일 끝나고 파주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힘내서 다시 걸었습니다. 이때부터 걷는 폼이 엉성해지기 시작했어요.


디지털 미디어시티역에서 대곡역을 향해서 걸어갔습니다. 수색, 화전, 강매, 행신, 능곡역을 지나야 했어요. 지하철 경의 중앙선 라인인데 오전에 걸었던 2호선에 비해서 각 역의 거리 차이가 많이 나는 것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지친 탓일까요? 2호선은 조금 걸으면 바로바로 다음 역이 나왔는데 경의 중앙선은 너무나 더뎠습니다. 지치기도 했고 원래 km차이가 많이 나는 듯했어요. 힘이 점점 빠져갔습니다. 가다가 벤치에서 양말을 벗었습니다. 물집이 더 잡혀있고 오른쪽 발등이 부어있었어요. 발을 쭉 뻗기도 하고 발목을 돌려보기도 했습니다. 고통이 밀려 오더군요. '하.. 학군단 훈련을 갈 때 60킬로 행군도 성공했는데 왜 이렇게 힘들지? 그때는 진짜 60킬로가 아니었나?'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30kg 이상의 완전군장을 메고 전투화도 신고 총기도 메고 걸었는데 왜 이렇게 힘들었을까요?


제가 신은 운동화는 오래된 러닝화였습니다. 깔창도 없었어요. 신은 양말과 가져온 양말도 얇디얇은 양말이었죠. 너무 만만하게 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남에서 파주까지 카카오 맵으로 걸어서 걸리는 시간을 계산했을 때도 잘못 판단했습니다. 제가 알파고가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반영하지 않았어요. 인간은 지치기 때문이죠. 걸으면 걸을수록 지치고 속도는 느려지고 도착시간은 늦어진다는 것을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을 깊이 있게 생각하지 못했어요. 하고자 하는 열망만 있었을 뿐 고민하지 않은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착각에 늪에 빠져있었던 것이죠.


그래도 가야 했습니다. 이번 도전을 포기하면 다른 것도 다 포기할 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왔기 때문입니다. 한 번이라도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행동하고 결국에는 아무런 것도 남지 않았던 지난 과거들이 떠올랐습니다. 음식을 주제로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되고 싶어서 돼지 잠옷을 입고 돼지고기 11가지 부위를 구웠던 날이 떠올랐습니다. 아침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구워대며 영상을 촬영했는데 전혀 기쁘지가 않았습니다. 저는 먹는 것만 좋아했지 영상을 촬영하고 편집하고 먹은 음식을 치우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음식을 좋아하니 음식 관련 영상을 찍는 것도 좋아할 거야'라는 짧은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은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걸었습니다. 마침내 대곡역에 도착했습니다. 시간은 19시 29분. 여기서 갑자기 심각해졌습니다. 합정에서 파주까지 가야 할 전체의 길 중에 반도 안 왔는데 벌써 오후에 걷기 시작한 시간에서 4시간이나 지난 것입니다. 그런데 다리는 '지금 파주지? 그만 좀 걸어'라고 신호를 보내는 상태였습니다. 허리 통증도 있었습니다. 물집이 안 잡힌 발바닥 부분으로 이쪽저쪽 다양하게 걸으니 관절에 무리가 갔는지 오른쪽 발등이 부풀어 올라 있었습니다. 이때 실감했습니다. '내가 여자 친구보다 늦게 도착하겠구나. 왕복은 불가능하겠구나'라고 말입니다.


아프고 힘든 와중에 대곡역 근처 길거리에서 누군가가 저를 불렀습니다. 할머니셨습니다. 할머니는 일산에 가는 버스를 타려면 어디서 타야 하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순간 머뭇거렸습니다. 일산에 가는 버스를 몰랐기 때문이죠. 발도 너무 아팠고 빨리 떠나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렸습니다. "죄송한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역 앞에 한번 가보시겠어요?"라고 말이죠. 그렇게 말하니 할머니가 "에구.. 큰일 났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한 아저씨가 자전거를 타고 우리 앞으로 오고 계셨어요. 할머니가 아저씨에게 길을 물었습니다. 아저씨는 할머니에게 손가락으로 위치를 가리키며 어디서 타시면 된다고 알려주셨습니다. '할머니가 아저씨를 만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전에 명동성당을 물어본 아주머니가 떠올랐습니다.


다시 한번 타인의 도움의 손길을 뿌리친 거죠. 오전에는 제가 부족해서 알려드리지 못한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찾아서 알려드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힘들고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에 대충 넘기려고 했습니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니 제 자신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오전의 아주머니를 보내고 떠올렸던 후회와 개선해야겠다는 다짐이 저녁에 되어서 물거품이 되듯 사라진 것입니다. 큰 죄책감이 밀려왔습니다. 두 번 다시는 이런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습니다.  


반성하며 다시 파주를 향해 지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곡산역을 중간 목표로 걸었는데 인도가 없는 암흑의 차로 나왔습니다. 플래시를 안 가져온 것을 후회했습니다. 까만 길을 걷고 있는데 차들이 내 뒤에서 달려왔어요. 이러다가 사고가 나겠다 싶어 핸드폰 플래시를 켰습니다. 어기적 어기적 걸으면서 핸드폰 플래시를 들은 손을 앞뒤로 흔들었습니다. 차들이 저를 보고 옆으로 비껴 달렸습니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입에서 자연스레 욕이 나왔습니다. 저도 깜짝 놀랐어요. 힘들면 본성이 나온다더니 정말 그런가 봅니다. 생각해보니 이때부터 너무 힘들어서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역 이름을 외치면서 걸었습니다. 곡산! 곡산! 곡산! 으아!!!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죠.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한 시간 만에 곡산역에 도착했습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어 바로 쉬지 않고 백마역으로 걸어갔습니다. 플래시와 카카오 맵 위치 정보를 켜놔서인지 핸드폰 배터리가 금세 닳아 꺼져버렸습니다. 핸드폰도 충전하고 저의 체력도 충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백마역으로 들어갔습니다. 20시 49분. 편의점에서 빵과 초콜릿 우유를 사고 고객 편의실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충전했습니다. 쉬고 있는데 여자 친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퇴근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22시 30분에 파주 금릉역에 도착 예정이라고 그녀가 말했습니다. 저는 지금의 상황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지칠 줄 몰랐어."


여자 친구는 제가 다칠까 봐 걱정이 돼서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지하철을 타라고 권유했습니다. 처음부터 무리하게 큰 것부터 시작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잠시 고민했습니다. 여자 친구 집까지 멋지게 걸어가서 만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습니다. 후회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말했어요.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힘들어서 나약해지려고 한다. 이번 도전을 실패하면 나중에 다른 일도 힘들어서 다 포기할 것 같아. 혜란이 집까지 걸어가게 해주면 안 돼? 밤늦게 도착할 텐데 복도에서 얼굴만 보고 갈게." 여자 친구는 저의 다짐이 갸륵해서인지 알았다고 했습니다. 원래 계획은 제가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으면 여자 친구가 퇴근하고 와서 삼겹살을 먹으러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자 친구는 밥도 안 먹고 퇴근해서 바로 오는 길이었습니다. 정말 미안했었죠.


사실 이 때도 상황 판단이 약간 흐렸었습니다. 여자 친구에게 금릉역에 도착해서 다이소가 열었으면 두꺼운 양말이랑 신발 깔창을 사달라고 부탁을 했었습니다. 원래 목표인 '왕복'에 대한 미련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목표는 조금 더 걸은 후 산산조각이 났어요.


백마역에서부터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경의 중앙선 다음 역인 풍산역을 향해서 걸었죠. 백마역에서 풍산역까지의 거리는 2km입니다. 그 2km를 1시간 만에 도착했습니다. 지하철로는 2분인 거리인데 말이죠. 몸을 베베 꼬면서 걸으면서 풍산! 풍산! 을 외치면서 걸었습니다. 고개를 땅으로 떨어뜨리고 발만 보고 걸었어요. 누군가 저를 봤으면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피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맞은편에서 사람이 걸어오면 아무렇지 않은 듯 서있거나 걸음걸이를 최대한 정상적으로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뭔가 이 상황이 웃기고도 슬펐습니다. 특별한 경험을 하는 설렘으로 출발했는데 이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걸 왜 한다고 했지..?'


고통스러움에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기하고 싶지가 않았어요. 힘들지만 해내야겠다는 생각이 제 마음속에서 들끓었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싶었고 이 고통을 추억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걸었습니다.


22시 56분. 일산의 황룡산 초입까지 오게 되었어요. 파주 금릉역까지는 6.8km가 남았습니다. 정상인의 걸음 거리로 1시간 43분이 걸리는 시간. 하지만 저는 1시간 43분이 지났을 때도 금릉역에 도착하지 못하고 황룡산 초입부터 금릉역까지 경로의 3분의 1 지점에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황룡산 초입에서 금릉역을 향하는 길은 완전 시골 논 길이었습니다. 왼쪽에는 비닐하우스가 있었으며 옆에는 도랑이 있었어요. 빛도 없고 인적이 드물어 멧돼지가 튀어나올 것 같은 음산한 분위기였습니다. 마치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사람이 다리를 절뚝이며 걸어가는 것처럼 거친 호흡을 내쉬면서 걸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오른쪽 도랑에 큰 물체가 빠지는 소리가 들려서 크게 놀라 넘어질 뻔했어요. 소리가 들리자마자 몸은 왼쪽으로 틀고 고개는 오른쪽으로 돌려서 물을 바라봤는데 다이빙 선수가 물에 빠졌을 때 보이는 것 같은 용솟음을 목격했습니다. '수달인가? 고라니가 물에 빠진 건가?' 빨리 그 자리를 피하고 싶어 빠르게 절뚝이며 걸었습니다. 워킹데드에 나오는 좀비같이 말이죠. 하지만 한동안 같은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왼쪽에는 비닐하우스였고 오른쪽에는 도랑이 흘렀죠.


도랑 길을 빠져나와 인적이 드문 차로를 걷게 됐습니다. 너무 어둡고 달리는 차들이 간혹 있어 플래시로 제가 있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배터리가 빠르게 소모돼 핸드폰이 꺼지려고 하더라고요. 제 다리도 닳고 있는 기분이어서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할 찰나 바로 눈 앞에 세븐일레븐 편의점이 보였습니다. 편의점에 들어가니 어린 남학생이 알바를 하고 있었어요. 핸드폰을 맡기고 충전을 부탁하니 고맙게도 흔쾌히 들어주더라고요.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편의점 밖 의자에 앉았습니다. 왼쪽을 바라보니 백구 새끼 두 마리가 저에게 달려오고 있었어요. 백구 새끼들은 내 신발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고 손을 내미자 좋다고 핥았댔습니다. 어미개는 쇠사슬에 묶여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몸은 고단하지만 작은 백구 새끼들이 너무나 귀여워 추억으로 남기고 싶어 떠나기 전 사진을 찍었습니다.


좀 쉬고 다시 걸었습니다. 자정이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여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오빠 어디쯤이야?" 저는 위치를 찍어 보내며 좀 많이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1시간 43분이면 도착하는 거리를 2시간 동안 3분의 1 지점 밖에 오지 못했으니 3~4시간은 더 걸어야 할 듯했습니다. 여자 친구는 금릉역에 오면 전화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깊은 잠에 빠져 못 받으면 어떡하지"라고 걱정을 했습니다. 저도 갑자기 불안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세 가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길바닥에 앉아서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 고민, 내가 파주로 향하는 목적은 여자 친구를 만나기 위함이다. 그런데 새벽 늦게 도착해서 여자 친구를 못 본다면 그게 의미가 있는 걸음인가?


두 번째 고민, 왕복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여자 친구를 걸어서 못 보고 마지막에 교통수단을 이용한다면 내 도전은 실패 아닌가?


세 번째 고민, 지금 위치에서 금릉역까지 택시를 타고 걸어왔다고 거짓말을 칠까? 아무도 모를 텐


고민을 하다가 결국 선택한 것은 택시를 타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도착하면 새벽 4시는 될 것이고 여자 친구는 자고 있을 것입니다. 제 전화를 받지 않는다면 저는 찜질방에 가게 될 것이고 정신을 못 차리고 깊은 잠에 빠져들 것입니다. 여자 친구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강남구청으로 출근하게 될 것입니다. 너무 끔찍했어요. 지금까지 걸어온 것이 하나도 의미 없는 일이 돼버린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바로 여자 친구한테 전화했습니다. "오빠가 생각해봤는데 혜란이를 오늘 꼭 만나야 될 것 같아. 택시 타고 갈 테니까 기다려"라고 말이죠. 여자 친구는 제가 오면 순대국밥을 사주겠다고 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카카오 택시를 불렀어요. 현 위치를 설정했는데 주소가 눈에 딱 띄었습니다. '경기도 파주시 상지석동 588-7 성산교회' 걸어서 파주에 도착한 것입니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파주구나'라고 생각하니 그래도 위안이 됐습니다. 그런데 카카오 택시가 잡히지 않았어요. 30분 동안이나 택시 호출하기를 계속 눌렀습니다. 중간중간 파주 콜택시에도 전화했어요. 하지만 '고객님 주변에 빈 택시가 없습니다. 다음에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메시지만 받았습니다.


어쩌면 택시를 타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에 휩싸였습니다. 마지막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카카오 택시 호출하기를 눌렀습니다. 역시나 안 잡혔어요. 대형 택시도 호출해보고 모범택시도 호출해보고 다해봤지만 택시가 없었습니다. 이때 불안한 상황에서도 '모범택시가 잡혀서 진짜 오면 가격이 얼마나 할까?'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은 00시 30분. 계속 카카오 택시 호출을 했습니다. '제발 와라...' 성산교회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심정으로 버튼을 누른 탓일까요? 결국 잡혔습니다. 7분 거리에 있는 택시가 저에게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택시를 타니 00시 39분이었습니다. 여자 친구에게 전화했습니다. "나 지금 택시 탔어. 집 앞으로 갈게."


여자 친구의 집 앞에 도착했습니다. 여자 친구가 나와서 제가 탄 택시를 탔습니다. 순대국밥 집이 있는 금릉역 앞에서 내렸습니다. 00시 51분. 15시 21분에 합정에서 출발했으니 9시 30분 만에 금릉역에 도착한 것입니다. '걸어서 금릉역까지 왔으면 더 뿌듯했겠지?'라는 아쉬움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새벽 1시가 가까워진 지금, 여자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것이 더 감사하게 생각돼 후회는 되지 않았습니다. 금릉역을 카메라로 촬영하고 순대국밥 집을 가려고 하니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여자 친구는 "24시간인데 왜 닫아있지?"라고 투덜거리며 저를 김밥천국으로 인도해줬습니다. 절뚝이는 저를 웃으면서 부축해줬죠.


김밥천국에서 치즈라면과 소고기 김밥, 돈가스, 칼국수를 흡입했습니다. 점심 말고는 제대로 먹은 것이 없어서 무척이나 허기졌어요. 먹기 전에 손을 씻으려고 주방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아주머니가 화장실에 가라고 키를 주신 것이 떠오르네요. 어기적 어기적 걸으며 화장실을 가는 제 모습을 보며 안쓰러워하면서도 재밌어하는 여자 친구의 표정을 생각나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여자 친구는 자기를 보러 와줘서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해줬습니다. 저는 "널 보러 오는 길이 왜 이렇게 힘드냐?"라고 물었습니다. 서로 추억할 것이 생겼습니다. 참 기뻤어요. 내 인생이 좀 더 풍요로워졌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음식을 다 먹고 다시 택시를 탔습니다. 찜질방은 걸어서 10분 거리인데 지금 상태로 걸어가면 1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찜질방까지 도전정신으로 걷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찜질방으로 가는 동선에 여자 친구 집도 걸려 있기 때문에 택시를 같이 탔어요. 오늘 고생했다며 찜질방에서 푹지지고 자라는 여자 친구의 음성이 듣기 좋았습니다. 여자 친구를 내려주고 찜질방 앞에서 내렸어요. 표를 끊고 옷을 벗고 샤워를 하고 탕에 들어갔습니다. 41도의 물 온도 속에서 노곤한 몸을 녹였습니다. 걸음걸이는 불편했지만 마음이 정말 편했어요. 어느 정도 몸의 피로를 풀고 뒤뚱거리며 찜질방 대기실로 들어왔습니다. 핸드폰 배터리는 밥 달라며 7퍼센트를 표시하고 있었습니다. 충전할 기력도 없었어요. 이부자리를 깔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홉 시에 잠에서 깼습니다. 일어나 보니 1% 정도 있었던 왕복 생각이 확 달아났어요. 하남에서 파주까지 편도로 가는 것은 '나만의 경험'을 하기 위한 도전이지만, 왕복하는 것은 '못 걷게 된 배경'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머니에 있는 배터리 충전기를 꺼내서 핸드폰에 끼웠습니다. 안마 의자 근처에 콘센트가 있더군요. 끼우고 안마의자에 앉아 천 원을 넣었습니다. 안마를 받으며 또 잠에 빠져들었어요. 많이 피곤했나 봅니다.


일어나 보니 12시 30분. 컵라면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습니다. 돌아갈 때는 마침 합정 회사 사무실에서 가져가야 할 물건도 있어서 지하철을 타고 합정을 거쳐 하남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금릉역에서 지하철을 탔습니다. 어제 오랜 시간 동안 걸려서 도착한 들을 단숨에 지나쳐 갔습니다. 금릉역에서 합정역. 9시간 30분 만에 온 거리를 46분만 에 도착했습니다. 세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 지하철을 포함한 교통수단은 정말 획기적인 발명품이다.

둘째, 세상이 편리하고 빨라졌지만 인생도 그에 비례해 별 의미 없이 빠르게 지나가버리는 것은 아닐까?

셋째,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낯설다. 가끔씩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도보여행을 해야겠다


합정역 사무실에서 가져가야 할 물건인 노트북 충전기를 챙겼습니다. 다시 하남으로 돌아가려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어머니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고생했다며 청량리 백화점으로 오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쇼핑을 하는데 같이 아버지 차를 타고 하남으로 가자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부모님이 있는 곳으로 갔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부모님은 어딘가 많이 불편해 보이는 저를 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한 거니?"라고 말입니다. 저는 말씀드렸습니다. "저만의 특별한 경험을 만들기 위해서요. 하남과 합정, 파주를 저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동일한 경로로 걷는 사람은 지구 상에 오직 저 하나뿐일 테니까요." 나만의 특별한 이야깃거리가 생긴 것입니다.


여자 친구와의 추억도 하나 늘었습니다. 예전에 여자 친구를 서운하게 했던 일화가 떠오르네요. 쉬는 날 파주에 있었던 여자 친구가, 퇴근 후 하남에 온 저에게 파주에 오라고 이야기했었죠. 저는 그 당시 피곤해서 여자 친구에게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나 퇴근해서 방금 하남에 도착했어! 여기서 파주까지 왔다 갔다 하는데 4시간인데 지금 오라고?! 미리 약속을 잡으면 안되니?"


그랬던 제가 새벽 6시 22분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 약 19시간이 걸려서 여자 친구를 만나고 왔습니다. 민간인의 신분으로 약 60킬로를 걸었네요.


앞으로는 하남에서 합정까지의 출퇴근 길도 남다르게 다가올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제게 집이 어디냐고 묻습니다. "하남이요." 회사는 어디냐고 묻습니다. "합정이요." 그때마다 물어본 분들은 저에게 말합니다. "꽤 거리가 있네요. 피곤하시겠어요."


그분들에게 말할 거리가 하나 생겼습니다. "아 예전에 그랬는데 하남에서 합정까지 한번 걸어보니까 이제는 그렇게 멀게 안 느껴져요."


이번 주말에는 몇 년에 걸쳐서 해야 할 경험들을 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돈 주고도 못할 경험을 한 거죠. 다리는 아프지만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혹시 지금 삶에 변화가 필요하신 분들이라면 저와 같은 경험을 하길 강력 추천합니다. 인생의 새로운 의미를 알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참, 하남에서 파주까지 걸으며 찍은 사진들이 궁금하시면 제 페이스북 게시물의 댓글을 확인하시면 됩니다. 신 박사님 고 작가님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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