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를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었을까? 향수는 사람을 유혹하는 향기다. 어린 시절 향수에 대해 몰랐다가 대학생이 되어서야 화장을 배우게 되고, 그때 비로소 향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당시에도 비싼 편이라 향수는 그저 테스터 향만 맡아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매장을 돌아다니며 손목에 살짝 뿌려보고, 그 잔향을 맡으며 상상 속에서나마 우아한 여인이 되어보곤 했다.
사회 초년생이 되고 결혼을 하면서 향수에도 여러 브랜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날 K뷰티로 세계 시장에 매력을 발산하는 시기가 올 줄은 상상도 못 했을 때, 우리는 해외 브랜드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어학연수와 배낭여행이 열풍을 불었고, 선진문화에 대한 동경으로 해외 문화의 지식을 습득하면서 그런 것들과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이때 알게 된 브랜드가 크리스천 디올, 샤넬 등이었다. 들어본 적도 없던 이름들이었지만, 극강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광고를 잡지와 화면 영상을 통해 보며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때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이 공동 개최되면서 그야말로 명품이 대중들에게 급속도로 유행하게 되었다. 대중교통만 타면 보인다는 '3초 백', 루이뷔통 스피디 모델이 전국의 레이디들에게 열풍을 가져다주었다. 가품과 진품이 3초마다 지나가면 보여서 3초 백이라는 별명이 지어졌다.
나는 동대문시장 두타와 밀레오레를 다니면서 보세 핸드백을 메고 다녔다. 사실 잘 알지 못해서 뭐가 예쁜지도 몰랐고, 그냥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골라 들었을 뿐이다. 내 주관도, 취향도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던 때였다.
내 결혼식에 피아노를 쳐준 친구에게 고마워서 신혼여행 때 면세점에서 처음 산 선물이 향수였다. 그와 동시에 샤넬 넘버 5의 광고는 나를 매우 현혹시켰다. 정말로 아름다운 향수일까? 실제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광고에서 유혹했기 때문에 좋은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어느 날 시누가 나를 보며 하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30대에는 싸구려 가방을 메면 보잘것없어 보여서 이렇게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닌다"라고 했다. 내 눈에도 그게 3초 백인지는 대충 알았지만, 정말 디자이너로서 내 눈에는 그게 예쁜지를 전혀 몰랐다. 패션에 대한 보는 눈이 아직 뜨지 않았으므로.
"그래요?" 나는 호기심에 대답했지만, 정말 그게 그렇게 아름답다면 한번 사볼까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시누는 크게 정색하며 말했다. "너처럼 20대는 아무거나 매도 예쁠 나이야."
다시 나는 '그런가?' 하며 생각을 접었다.
그러던 중 남편이 해외 업무차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남편이 면세점에서 뭘 사다 줄까 하기에, 그럼 그냥 샤넬 넘버 5 향수를 사달라고 했다. 남편은 알았다고 하며 해외 일정을 소화하고 향수를 가지고 왔다.
생각지도 못하게 남편이 정말 사가지고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드디어 내 손에 들어온 그 유명한 샤넬 넘버 5. 하지만 선물을 건네준 남편의 말이 내 날아가는 마음을 두 동강으로 절단했다.
"야, 누나가 그러는데 이런 사치품, 명품 좋아하는 것은 된장녀래. 나는 샤넬 넘버 5 향수를 사면서도 우리가 이걸 사는 게 맞는 건지, 네가 된장녀일까 봐 너무 손이 떨리더라."
명품백을 사달라는 것도 아니고 고작 향수인데, 이름이 샤넬이라는 것만으로 남편은 내가 허영심과 사치를 부리는 여자인지 의심했다고 한다. 심지어 누나에게 이야기를 듣고는 명품을 좋아하면 살림 거덜 난다고 조언까지 들었던 모양이었다.
향수가 사치품인 것은 맞지만, 내가 된장녀 소리까지 들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이 가슴에 깊이 박혀서 쉽게 잊히지 않았다. 그 향수는 결국 남편이 회사를 다니며 뿌리고 다니다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수년이 흐른 뒤에 다시 면세점에서 남편을 통해 샤넬 넘버 5 향수를 샀다. 그것은 과거에 내가 된장녀 소리까지 들었는데도 결국 제대로 써보지 못한 향수에 대한 애증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집에 몇 년간 향수를 두고 보면서도 뿌려보지 못하고, 그저 한구석에 자리만 잡고 있었다. 마치 내 마음속 어딘가에 '된장녀'라는 낙인이 찍혀서 자유롭게 즐길 수 없는 것처럼.
아들이 대학생이 되면서 몸 냄새나는 것을 막고 싶다더니, 결국 내 허락도 없이 샤넬 넘버 5 향수를 가져가 버렸다. 모든 물건에는 발이 있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물건은 어떤 방식으로든 쓰임을 하나 보다.
결국 내 허상으로 만족했던 향수는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우리 집안의 남자들에 의해 사라졌다. 나에게는 '된장녀'라는 오명만 기억에 남게 되었다.
결혼을 하면 모든 물건이 있다가도 사라지고 없다가도 생겨난다. 내 물건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우리의 물건이 되고, 동시에 우리의 물건이면서도 내 물건이 되는 것이기에 물건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게 된다.
샤넬 넘버 5라는 하나의 향수를 둘러싼 이 긴 여정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하나의 '꿈'이었다. 대학생 때 테스터만으로도 만족했던 순수한 동경심, 신혼여행 때 친구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려던 마음, 광고에 현혹되면서도 스스로의 취향을 찾아가려던 과정들이 모두 그 작은 병 안에 담겨 있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그 소소한 욕망조차 '허영심'이라는 낙인을 찍혀야 했던 순간이었다. 향수 하나에도 "된장녀"라는 말을 들으며, 내 마음 한구석의 작은 바람이 부끄러운 것으로 치부되어 버렸다. 그래서 결국 그 향수를 제대로 즐겨보지도 못하고 구석에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결혼 후 '내 것'과 '우리 것'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생기는 미묘한 상실감 속에서도, 때로는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지키고 싶은 것들이 있다는 걸. 그리고 그런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용기 있는 선언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키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 꼭 가족들에게 말해야 한다.
"이 물건의 발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