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어른이 되는 법』
첫 글을 올리던 그 밤이 아직도 기억난다. 세상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문장을 써보겠다고 벅찬 마음을 안고 있었다. 어쩌면 내 글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는, 풋풋하고 철없는 믿음도 품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현실이 내 마음을 살짝 다듬어주었다. 내 글을 좋아해 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전혀 다르게 읽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댓글과 메시지 사이에서 나는 세상을 하나의 상식으로 꿰뚫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조금씩 배웠다. 다 이해하지 못해도, 이해하려고 애써보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왜 저러지?”라는 속상함을 “어디서부터 그랬을까?”라는 질문으로 바꿔보는 일도 시작했다. 너와 나의 이야기가 다른데, 어째서 같은 결론에 이를 수 있겠는가. 자란 환경, 들으며 익힌 말, 버티며 체득한 생존방식이 각자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참아라”라는 말속에서 컸고, 또 다른 사람은 “마음을 표현해라”는 분위기에서 컸다. 같은 상황을 두고서도 서로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해를 시도하는 일은 거창한 게 아니다. 오히려 속도를 살짝 늦추는 것에서 시작된다.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고, 상대의 말을 다시 확인해 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네가 말한 ‘억울함’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서 쌓인 거지?” 하고 다정하게 물어주면, 상대의 이야기 속이 한 겹 더 보이기 마련이다. 그 사이, 내 안에 있던 확신들은 조금씩 작아지고, 상상력이 틈을 메운다. 물론, 상상력은 동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상대의 사정에 대한 작은 예의다.
그래도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은 여전히 찾아온다. 아무리 들어봐도 고개가 안 끄덕여지는 말이나, 도저히 납득 안 되는 행동이 그렇다. 이럴 때는, 존중이란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인정이 곧 동의는 아니다. 다만, 상대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태도일 뿐이다. 이 한 문장이 있어야 대화가 싸움이 아니라 관계로 남고, 서로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둘 때 우리는 덜 상처받고 지나갈 수 있다.
하지만 존중에도 선이 필요하다. 상처를 키우는 폭력, 누군가를 깎아내리는 혐오, 사실을 무시하는 왜곡 같은 것들 앞에서까지 “그럴 수도 있지”라고 머물러선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늘 두 문장을 마음에 새긴다. “나는 네 생각을 존중해.” “그런데 이 선을 넘는 말과 행동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렇게 선이 분명해야 둘만의 안전이 생기고, 안전이 있어야만 이해하려는 시도도 계속된다.
살아보니 내 상식도 자주 틀렸다. 상식이라는 게 모두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동네마다 온도와 높이가 조금씩 다르다. 동네가 달라지면 억양도 달라지듯, 환경이 바뀌면 상식이란 것도 너울이 생긴다. 그걸 알게 된 뒤부터는 글을 쓸 때 “사람은 원래” 대신 “나는 이렇게 느꼈다”라고 자주 쓴다. 주어 하나만 바뀌어도 말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부드러워야 멀리 갈 수 있으니까.
내가 직접 해보고 도움이 됐던 건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시간. 즉답 대신 약간의 여유를 두는 것. “내일 다시 얘기하자”라고 하면 감정의 거품이 가라앉고 필요한 말만 남는다. 또 다른 하나는 거리. 내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자리인지, 그저 곁에서 들어주는 걸로 충분한지 구분하는 것. 이런 구분이 되면 설교는 줄고, 자연스레 듣는 시간이 많아진다. 그러다 보면 상대방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정리해 가기 시작한다. 그럴 때 비로소 “지금 너한테 가장 중요한 건 뭐야?” 같은 질문이 힘을 발한다.
나 자신에게도 같은 방식을 적용한다. 내 생각을 억지로 설득하지 말고, 먼저 차분히 적어본다. 왜 이 지점에서 내가 이렇게 흔들리는지 스스로 묻고 글로도 남겨본다. 적다 보면 내 배경이 보이고, 그 배경을 알면 고집도 조금 풀린다. 그렇게 마음이 느슨해졌을 때야 상대의 말이 내 안으로 들어올 틈이 생긴다. 이해란 상대에게만 요구할 일이 아니라, 나 역시 훈련하며 길러야 하는 습관임을 깨닫는다.
살다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점점 많아진다. 그럴 때 나는 포기하지 않고, 방식만 바꾼다. 모든 걸 이해하려 애쓰는 대신, 이해하고픈 마음만은 붙잡으려고 한다. 그 마음이 내 안에 있으면, 동의하지 못해도 상대를 깎아내리지 않게 된다. 설득이 안 돼도 미워하지 않는다. 미움 없이 거리를 둘 줄 알게 되고,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함께 머무를 작은 지점은 남겨둔다. 어쩌면 그 자리가 우리 사이의 최소한의 다리인지도 모른다.
첫 글을 올리던 그 밤과 지금의 나는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세상을 바꿀 만한 문장을 쓰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지만, 이제는 누군가의 밤을 괜히 망치지 않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더 크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글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사정을 괜히 무겁게도, 또 가볍게도 만들지 않는 글을 쓰고 싶다. 누군가 보기엔 그 목표가 작은 것처럼 보여도, 어쩌면 글이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소중한 역할일지 모른다. 이해를 무턱대고 늘릴 순 없어도, 존중이라는 마음만큼은 조금 더 나눌 수 있으니 말이다.
오늘도 누군가의 말을 들으며, 잠시 걸음을 멈춘다.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을지도 몰라.” 이 한마디를 속으로 되뇌며, 조용히 숨을 고른다. 그 한 번의 숨이 내 말을 바꿔주고, 때로는 아슬아슬했던 관계도 다시 살려준다. 이해의 마지막 끝자락에서, 결국 우리를 붙드는 건 존중이라는 마음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