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스타 Sep 29. 2020

신혼집, 채우지 말고 비워야 한다

D-249, 집도 마음도 미니멀 라이프

중학교 때 친구들에게 받은 생일 축하 편지, 고1 제주도 수학여행 사진과 고3 수능 원서 사진,

대학교 수업에서 쓴 필기 노트와 두꺼운 전공책, 취준생 시절 매일 아침마다 말씀 묵상을 기록한 QT책.


내 방 책꽂이와 서랍에 있는 물건들이다.

그 옛날의 추억과 그때 그 감정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잘 버리지 못하고 있다.

몇 년 동안 꺼내보지 않아서 이제는 먼지가 많이 쌓였길래 버리려고 꺼냈다가도,

막상 펼쳐보는 순간 그때의 나, 그때의 기억들이 떠올라 피식 웃으면서 다시 서랍에 집어넣곤 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장 정리를 하지만, 평소 안 입는 옷을 버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지난겨울, 다가올 봄에 입을 옷들을 정리하면서 작년에 한 번도 안 입은 블라우스를 꺼냈다.

'올해 한 번쯤은 입겠지?'

하지만 올봄 내내 옷걸이에만 걸려 있다가 여름을 앞두고 정리함으로 들어갔고, 이번에 가을 옷을 꺼내며 다시 옷장으로 돌아왔다.

이 옷은 아마 이번 가을에도 한 번도 안 입을 것이고, 내년 봄쯤 돼야 헌 옷 수거함에 들어가 있을 것 같다.


낡은 물건 하나도 그 속에 담긴 추억을 너무 크게 받아들여 자꾸 간직하려고 하고,

굳이 필요 없는 물건인 것 같아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잘 버리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결혼을 한다고 해서 굳이 이 모든 것과 이별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신혼집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전세 계약 전, 떨리는 마음으로 신혼집을 방문했다.

평면도를 보고 집이 'ㄱ'자 모양이라는 것에 미묘한 불안감이 들긴 했지만, 애써 무시하며 기대감과 설렘을 안고 현관문을 열었다.

어린 시절 보았던 박수홍의 러브하우스 노래를 부르면서 입장했을 때 나의 첫마디는.

"좁다!"


현관을 지나고, 화장실을 지나고, 주방을 지나며, 그 짧은 순간 동안 나는 계속 말했다.

"좁다, 좁아!"


사실 전용면적 자체가 그렇게 적은 편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현관에서부터 거실까지의 좁고 긴 통로에 너무 많은 면적이 사용되어서, 막상 실제 거주공간인 거실과 방은 유난히 좁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한 바퀴 둘러보는데 생각보다 짧은 시간이 걸렸고, 이전에 적어두었던 수많은 가전제품과 가구들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해야 할지 답답해졌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면서 집 안을 돌아다니다가, 문득 창밖의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거실과 방에 있는 널찍한 창문, 그리고 그 창문으로 보이는 파랗고 예쁜 가을 하늘.

감탄이 나올 정도로 예쁜 하늘이 우리 집에서 보이는 방구석 뷰라는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깔끔한 화장실과 수납공간이 충분한 주방, 신혼부부를 위한 아늑한 방과 거실.

신혼집의 좋은 점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면서, 방금 전까지 불평했던 것이 부끄럽게 느껴지고 다시 감사의 마음이 밀려왔다.

행복주택을 신청하게 된 과정, 당첨이 되었을 때 기쁘고 감사했던 마음, 덕분에 집을 알아보러 다니는 수고와 불안과 걱정을 덜 수 있었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얼마나 쉽게 감사한 마음을 잊어버리고 갖지 못한 것에 주목하는지 깨닫고,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좋은 집인 이 곳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을 시작했다.



현관부터 거실, 방, 다용도실까지 영상과 사진으로 열심히 남긴 뒤, 줄자로 이곳저곳 수치를 재며 집안을 어떻게 채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맨 처음 결혼 예산을 세우며 함께 적었던 혼수 리스트를 꺼내 하나하나 집안에 배치해 보았다.


인터넷 결합 사은품으로 받으려고 했던 TV, 꿉꿉한 장마철 필수템이라는 건조기, 회식 후 고기 냄새를 깔끔하게 제거해줄 스타일러, 창문 열기 걱정되는 미세먼지 많은 봄에도 방 안을 쾌적하게 만들어줄 공기청정기.

거실이든 방 안이든 놓는 순간 답답하고 좁을 것 같아서, 미련 하나 없이 깔끔하게 리스트에서 지워버렸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시몬스 vs. 에이스', '킹사이즈 vs. 퀸사이즈'로 웨딩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구었던 논쟁이 무색할 만큼, 우리는 과감하게 침대를 신혼부부 필수템에서 제외시켰다.


매일 아침저녁 앉아서 거울을 볼 수 있는 화장대, 거실 한 켠 편안하게 앉아 커피를 마실 예정이었던 소파, 그리고 나의 추억이 담긴 수많은 물건을 담아둘 옷장과 수납장과 행거.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이 모든 게 들어갈 거라는 얼토당토않은 믿음이 있었던 걸까.

거실 하나 방 하나인 집에서 뭘 그렇게 많이 넣으려고 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리스트를 정리했다.


수많은 X 표시와 함께, 엄청나게 간소한 10개짜리 혼수 리스트가 완성되었다.

냉장고, 세탁기, 전자레인지, 인덕션, 밥솥, 청소기.

그리고 거실에 둘 식탁과 의자. 방에 둘 매트리스와 옷장.

공간을 가득 채워 답답한 느낌이 드는 것보다 조금 부족해도 여유로운 느낌을 갖고 싶어서, 결코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것만 사기로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숙제.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필요 없는 것을 버리는 일이 남았다.

오랫동안 버리지 않고 간직해둔 추억의 편지, 한 번 읽고 절대 펼쳐보지 않은 수많은 책들, 낡아서 안 들고 다니는 가방과 유행이 지나 거의 안 입는 옷.

왠지 필요하고 소중한 것 같아 포기하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할 것이다.

결혼이라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나의 주변을 정리하며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 역시 함께 준비하고 싶다.




어차피 살다 보면 분명 필요한 것들이 생길 것이고,

살면서 지금의 공간을 더욱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들도 발견할 것이다.

어쩌면 앞으로는 지금의 빈 공간을 계속 채워갈 일만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꽉 채우려고 애쓰기보다는, 정말 필요한 것만 먼저 채우고 나머지는 비워둘 수 있는 넉넉한 여유를 실천하고 싶다.


신혼집만 그런 것은 아니다.

나의 마음 역시 필요 없는 것은 비우고, 더욱 소중한 것들로 채워갈 것이다.


자꾸 남들 하는 것 따라하기에 급급했던 욕심과 비교의식,

정말 필요한 것보다 겉으로 보기에 괜찮고 좋은 것을 먼저 선택하려 하는 허례허식,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에 주목하는 불평불만의 마음을 비우고,


우리의 기준에서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

물건에 담긴 소중한 추억을 마음에 더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따뜻함,

오늘 하루, 지금의 삶에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고 만족할 수 있는 넉넉함과 풍족함으로 나를 채워가기를.


그렇게 진정한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기를 바란다.



[출처]

커버 사진 https://unsplash.com/photos/HstwCJX0jT4

작가의 이전글 나는 오늘도 프러포즈 반지를 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