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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홀 May 04. 2016

물 위에 떠 있는 섬

캄보디아로 출장을 다녀온 후 이틀 후 국내 출장을 가게 되었다. 체력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청명한 가을 날씨를 만끽하고 싶어 국내 출장을 자처했다.


가을 하늘뿐만 아니라 마음을 끄는 건 출장 일정에 부석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명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란 책의 그 무량수전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였다.  10여 년 전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소개를 했던 책이었다.  책을 고를 때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고 사는 경우가 많은 사람으로서, 그때 TV에서 소개하던 책의 대부분을 사서 읽을 때였다. 지금은 내용을 기억할 수 없지만 그 당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란 책을 소개하던 분은 재주가 남달랐던 것 같다. 10여 년이 지나도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또렷이 기억나고 가보고 싶게 만든 걸 보니.


대절한 버스를 타고 3시간을 달려 영주에 도착했다.  부석사로 올라가는 길은 사과를 파는 사람들이 길 양쪽을 차지하고 있어 도저히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빨갛고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사과, 무게는 미처 생각하지도 못하고, 한 바구니를 담고 들자마자 후회를 했다. '내려올 때 살 걸...' 다시 물릴 수도 없어 낑낑거리며 올라가다 같이 간 사람들에게 인심 쓰듯 하나씩 나눠 주고서야 손이 가벼워졌다.

부석사

부석사를 안내하는 해설사 분은 입구에 오자 "여기 아래에서 4명의 부처를 먼저 보라"고 하며 한 곳을 가리켰다.  꼭대기에 위치한 안양루에 부처님이 앉아있다고 하며 가리키는데, 도무지 잘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가까이 가면 더 안 보일 테니 이쯤에서 보라고, 봐야 할 위치를 알려준다. 그제야 부처상이 보였는데, 올라가면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건 안양루 누각 조각이 그렇게 새겨진 것이기 때문이라며 해가질 무렵에는 금빛 옷을 입은 부처상으로 보인다고 한다.  계단을 힘겹게 올라 가까이서 보니 정말 그랬다.

부석사

그리고 마침내 무량수전 앞에 섰다.  

그런데 독특한 건축양식이라는 배흘림기둥을 막상 보니 덤덤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배흘림'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갖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막연한 기대만 갖고 보았으니 그랬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 모르니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참이다.

사전 지식이 있었다면 그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감탄했을 텐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기둥 자체가 어떤 감동을 줄 것이라 기대했던 것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그러고 보면 이렇게 막연한 기대를 했다 실망한 경우가 많다.  특히 연애에 있어서.  잘 모르는 내 관점이 아니라 상대방을 제대로 알고 이해를 바탕으로 그의 관점에서 접근했다면 더 좋은 관계를 유지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뜻 밖의 감탄은 무량수전 앞에서 바라본 하늘과 그 아래 세상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산, 하늘, 그 아래 맑게 서 있는 건물들.  흔하게 봐왔던 하늘과 산인데 정말 다르게 보였다. 아마도 청명한 가을 날씨 때문이지 않았을까!  날씨는 특히 여행의 순간을 느끼고 기억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치니까.

무량수전 앞 광경

부석사를 내려와 고택으로 이루어진 마을을 방문했다.  '물 위에 떠 있는 섬'이라고 하여 "무섬"이라고 불리는 마을.  언뜻 들었을 때는 없는 섬이라는 뜻인 줄 알았는데, 낙동강 지류가 만들어낸 물동이 마을이다.  채 100명도 안 되는 주민이 사는 작은 마을은 온통 문화재와 민속자료로 지정된 가옥들이 많았는데 진짜 없는 것도 있었다.  제주도는 세 가지가 많아 삼다도라고 하는데 물섬인 무섬마을은 세 가지가 없다.


대문. 농토. 우물.


집성촌 마을인 이곳은 대문이 필요 없고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우물이 필요 없고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걸어서 돌아봐도 금방 둘러볼 수 있는 작은 섬 마을.  


이번 여행의 백미는 이 곳 이었다.

전혀 알지도 못하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곳인데, 인적이 드문 이 마을이 지닌 고즈넉함은 사람을 차분하게 만들고 한가로이 강가를 거닐며 사색에 잠기고 싶게 했다.  가끔 내 안의 정서를 들여다보면 확실히 시끌벅적함과는 거리가 있다. 정적이고 느림. 이런 정서와 잘 맞는 장소를 찾은 기분이었다.  특히, 그 옛날 외지로 나가는 통로였던 외나무다리가 더욱 이 마을의 고요함을 대변하고 있는 듯 보였다.  속세를 등지고 마음의 수양을 쌓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이 곳을 혼자만 알고 있다는 안타까움에, 다음에는 반드시 좋아하는 사람과 다시 찾아와 하룻밤 묵고 가리라 다짐했다.  

무섬마을

그런데 공중 화장실의 상태는 버스를 타고 다시 육지에 닿을 때까지 참아야만 하는 고통을 안겨 주었다.  역시 어쩔 수 없는 도시 여자다.  딱 하룻밤만 묵는 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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