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24
어제 막내 동생으로부터 톡이 왔다. 시험지를 사진으로 찍어 보냈다.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한 딸의 수학, 중국어 시험 점수가 적혀있다. 내신 1등급이란다. 동생은 딸이 자랑스러워 톡을 한 거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공부하기 싫다고 한 조카다. 반 애들이 학원 다니니까 같이 다닌 거지 공부에 흥미가 없던 아이다. 그래서 뷰티 특성화 고등학교에 갔다. 어려서부터 화장하는 걸 좋아했고 잘했다. 네일도 혼자 발랐다는데 전문가가 해 준 것 같았다. 여행 가면 회장품과 클렌징이 나보다 많아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어린애가 화장한다고 걱정한 적도 있다. 그러나 조카는 자신이 좋아하는 걸 발판으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겠다고 했다. 죽고 못 사는 연예인이 있어 팬 사인회에 열성적으로 다니는데, 그 연예인의 전담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대환영이었다. 그 나이에 하고 싶은 게 없어 고민인 애들이 많은데(고3인 조카가 하고 싶은 게 없지만 일단 공부한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았고 목표도 뚜렷하니 대견했다. 고등학교에서 관련 자격증을 다 따겠다는 기특한 각오도 내비쳐서 칭찬했다. 꼭 대학을 가지 않아도 된다. 하고 싶고 되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면 인생이 풍요로워진다는 걸 알기에 조카의 진로 선택에 박수를 쳤다.
그런데 정작 가고 싶던 미용과를 못 갔다. 경쟁이 심해서 차선으로 시각디자인과를 갔다. 1학년 성적이 좋으면 전과를 할 수 있단다. 조카는 시각디자인도 배워보니 괜찮은 것 같다고 했다. 막냇동생이 오늘 또 톡을 했다. 조카가 반에서 1등을 했다고. 문자에서 기쁨과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축하인사를 했다. 조카에게도 따로 훌륭하다고 문자를 보냈다. 한 번도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 없는 아이가 1등을 하다니. 그 성취감이 얼마나 대단할지 눈에 선했다. 자신감이 생기면서 더 열심히 공부할 것 같았다. 너무도 기쁜 소식이라 부모님에게 말씀드렸다. 아빠는 처음에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셨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웃으셨다. 엄마도 "어머나, 잘했네"라고 하시며 즐거워하셨다. 조카가 공부로 풀릴지 몰랐는데 의외의 결과에 은근 욕심이 생긴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도 좋지만, 공부하면 더 많은 선택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제 17살의 생각은 다른 기회를 만나 바뀔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큰 조카가 그랬다. 그 아이도 모델이 되겠다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가 2학년에 예술고등학교로 편입했다. 편입할 학교를 스스로 알아보고 시험 봐서 갔다. 그러나 2년 동안 조카는 좌절을 맛봐야 했다. 키 큰 거 하나 믿고 모델이 되려 했으나 외모가 더 좋고 끼가 많은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게다가 식탐이 있어서 살을 빼지 못했다. 신체조건으로 먼저 승부 보는 세계에서 밀렸다. 워킹을 잘하고 포즈를 잘 잡아 선생님들이 칭찬해 줬지만 뒤에는 꼭 "살 빼라"가 붙었다. "살만 빼면 된다"인데 굶다가 폭식했다. (우리가 보기엔 이미 날씬한데 모델계에서는 아니었다) 지방흡입 수술을 받고 싶다고 해 가족들이 모두 반대했다. 식단조절, 운동으로 못한다면 모델을 하지 말라고 했다. 평생 몸매 관리해야 하는 직업인데 그걸 못하면, 그 정도로 간절하지 않다는 증거이므로 다시 생각해 보라고 했다. 결국 고3 때 모델과를 포기하고 연극영화과로 목표를 바꾸고 연기학원에 다녔지만, 이미 수년간 준비한 애들과 경쟁에서 이기기 어려웠다. 연기력이 출중하지 않았다. 조카는 재수를 하겠다고 했지만 우리가 보기에 재수한다고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조카는 갑자기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상태에 놓였다. 우리는 재수학원에 들일 시간과 돈을 영어에 들이라고 뉴질랜드로 어학연수를 보냈다. 영어라도 배우라고. 그건 확실히 머리에 남는 일이고 다른 길로 인도할 기회가 될 수 있으므로.
그리고 지금 뉴질랜드에서 대학 입학과정에 다니고 있다. 수학, 과학, 경제학 등을 배우고 고3처럼 새벽부터 밤늦도록 공부한다. 첫 중간고사를 봤는데 성적이 좋다. 심지어 과학은 만점이다. 그것도 영어로 본시험에서. 한국에서 수포자였는데 다행히 중3까지 공부한 실력이 남아 겨우 따라가고 있단다. 스물한 살인 조카도 자신감을 되찾으며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공부는 안 해서 그렇지, 원래 못하는 사람은 없다고 본다. 공부하는 요령을 몰라서 시간을 들인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으니 재미없고, 그러다 보니 하기 싫어지고 안 하다 보니 성적이 나쁜 거다. 공부하는 방법을 알면 누구나 일정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아주 특출 나게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거기에 알파 요소가 더해져서 그렇다. 아이큐가 월등히 높거나 남들보다 더 노력하는 등. 예체능 분야에 타고난 기질이 없고 뭘 해야 할지 모른다면 일단 공부하는 것을 추천한다. 공부는 다양한 가능성의 문을 열 계기를 마련해 준다. 원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발견할 수도 있고, 전혀 알지 못했던 길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른들이 기술이 없으면 일단 대학에 가라고 한 말에 이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