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때때로 같은 시간을 서로 다른 기억으로 간직하며 살아가곤 한다.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친구와 같은 공연을 보고 난 뒤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나에게는 잊지 못할 최고의 공연이 친구에게는 그저 그런 공연이었음을 알게 된 경험.
혹은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과 이야기를 나누니 나에게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수험생 시절이 누군가에게는 학창 시절의 치열함과 젊음의 추억으로 기억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놀라움과 같은 것들 말이다.
같은 시간이 모두에게 '같은 색과 맛'으로 기억되지는 않으며, 시간과 공간은 그렇게 모두에게 각자 다른 색과 농도로 기억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행복과 설렘, 만족감으로 기억되는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괴롭고 벗어나고 싶은 시간이 되는 것.
참으로 아이러니하지만 분명 우리는 그런 시간을 생각보다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얼마나 돌리는지에 따라 풍경이 달라지는 만화경처럼, 삶은 각자에게 다른 모습으로 비치는 것이다
연휴의 시작, 카페에 앉아 매년 찾아오는 이맘때의 시간과 공간을 떠올려본다.
"추석 몇 밤이나 남았어?"
추석이 다가오면 부모님께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이 아니었을까.
어린 시절의 내게 명절은 손꼽아 기다리는 시간이자 또래 사촌들을 만날 수 있는 설렘의 시간으로 남아있다.
명절 전날부터 간 할머니 댁에서의 낯설면서도 친숙한 하룻밤.
아직 가시지 않은 더위에 바닥을 지키던 대자리에서 한숨 자고 일어났을 때의 기분 좋은 몽롱함.
사촌들과 할머니 집 앞 놀이터로, 공원으로 뛰어다니며 땀범벅이 될 때까지 놀았던 기억.
오랜만에 먹는 명절 음식은 또 얼마나 맛이 있었던지.
고소한 녹두전, 입에서 살살 녹는 갈비찜은 명절을 더욱 기다리게 하는 것 중 단연 으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신나던 명절 연휴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아쉬움과 함께 다음 명절을 기다리게 하는 길, 하루만 더 놀고 가면 안 되냐는 투정은 덤으로 얹어가는 길이었다.
이쯤 해서 만화경을 엄마에게로 돌려보면 어떨까.
연휴가 다가오기 시작하면 엄마에게서 가장 자주 들을 수 있는 질문은 "추석 때 뭐 먹을까?"였던 듯하다.
각종 나물과 전, 갈비찜까지 수많은 음식이 엄마의 손을 거쳐 상을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늘 무언가 부족할까, 적어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을 했다.
엄마의 명절은 이미 그 초입부터 '걱정'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연휴의 시작과 동시에 시작되던 만두 빚기와 전 부치기.
'이번에는 얼마 하지 않았다'는 할머니의 말이 무색하게 커다란 통 한 가득이던 만두 속과 전 반죽.
기름 냄새를 너무 맡아 전을 먹고 싶지 않다던 엄마의 말을 되새겨본다.
아마도 어린 내가 설렘으로 보냈던 명절의 그 시간이 엄마에게는 노동과 피로함의 색채로 남아있으리라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일이지 않을까.
매번 명절마다 찾아오는 고모들과는 다르게 30년 가까이 한 번도 가지 못했던 친정.
고모들의 방문이 어린 내게는 사촌들과 놀 수 있는 '단맛'의 시간이었다면, 엄마에게는 아쉬움과 슬픔을 눌렀던 '쓴맛'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연휴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엄마의 표정에서 피곤함과 더불어 약간의 후련함을 찾아볼 수 있었던 것도 우리가 '다른 시간'을 경험했기 때문이리라.
아마도 참 오랜 시간 엄마는 함께 모인 가족들의 '달콤한 시간'을 위해 자신의 쓰디쓴 시간을 감내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시간 누군가는 그 사실을 몰랐거나, 알면서도 자신의 달콤한 시간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인지도.
시간이 흐르며 나 또한 어린 시절 명절의 단맛보다는 엄마가 겪어야 했던 쓴 맛을 더욱 공감하는 쪽으로 바뀐 만화경으로 그 시간을 보아왔던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의 명절은 과연 어떠한 색채의 만화경으로 바라보게 될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제 보게 될 명절의 만화경은 조금은 덜 아프고 더 달콤한 풍경을 보여주기를 바랄 뿐이다.
명절 연휴를 앞두고 설레는 모습으로 고향을 찾는 이들의 모습을 티브이에서, 라디오에서 만날 수 있다.
그 모습을 보며 이 시간이, 고향을 찾는 그 마음이 모두에게 같은 설렘과 행복의 색으로 칠해질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생각해 본다.
비단 명절뿐이겠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평범함의 만화경, 누군가에게는 행복과 여유의 만화경, 또 누군가에게는 고통과 괴로움의 만화경을 통해 비추어진다는 것.
그리하여 내가 가진 만화경으로 다른 이의 삶을 재단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면서도 쉽게 잊곤 하는 듯하다.
모두의 일상이, 다가오는 모두의 연휴가 반짝이고 행복한 만화경의 풍경이기를.
늦더위가 가시지 않는 어느 연휴에, 작은 바람을 글에 실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