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oorisee Oct 25. 2024

[검은색] 나의 김밥 연대기

검은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두운 색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기도 하거니와 검은색이 잘 어울리지 않는 것도 검은색에 대한 거리 두기에 한몫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어두운 옷을 살 때면 검은색보다는 남색에 손이 가고, 잠깐 구경을 하다 보면 어느새 아이보리나 브라운 계열의 옷을 들고 있는 내게 검은색은 '마지못해 고르는 색'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옷장에서는 검은색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선호하지 않는 나이지만 그런 내게도 유일하게 선호하는 '검은색'이 존재한다.


흰 밥 위에만 올려 먹어도 고소한 김.

이 해조류를 먹을 때만큼은 나는 검은색을 사랑하게 된다.


짭짤한 조미김도 맛있지만, 특히 색색의 속재료를 품고 있는 김밥은 언제든 뾰족해진 나를 무장해제시키는 마성의 음식이라 할 수 있겠다.


참치, 불고기, 치즈, 때로는 돈가스나 소시지까지.

다양한 재료와 김과의 조화를 맛보는 것 또한 김밥을 먹는 묘미 중 하나 아니겠는가.


클래식한 기본 김밥은 부담 없이 넘어가는 맛이 있고, 참치김밥은 마요네즈와의 고소한 어울림이 좋아 자주 찾게 된다.


때때로 매콤한 땡초가 들어간 김밥도 놓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김밥에 대한 나의 사랑이 얼마나 지대한가 하면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면 마지막으로 무엇을 먹을래?'라는 질문에 단숨에 '김밥'이라고 답할 정도인 것이다.


그렇게 김밥을 자주 먹는 만큼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김밥이 함께 떠오르는 기억들이 꽤나 많음에 놀라곤 한다.


대학시절 학교 안에는 학우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김밥집이 있었다.


참치김밥, 참치김밥과 유부초밥이라는 단출한 메뉴에도 불구하고 목이 막힐 정도로 꽉꽉 채워 넣어주는 참치가 어찌나 고소하고 맛있던지.


아침 일찍 부랴부랴 나서야 했던 긴 통학길도, 때때로 인류애를 상실하게 하는 번잡한 지하철에서의 괴로움도 김밥 앞에서는 모두 녹아버렸던 기억이 선명하다.


김밥집 바로 앞에서 팔던 아이스초코와 함께 먹는 참치김밥은 때 때로 쓰라리고 철없던 나의 대학생활을 고소하고 부드럽게 덧칠해 주었다.


어느 봄날, 학교의 김밥을 싸들고 간 현충원에서 본 벚꽃도. 친구와 맘껏 나누었던 봄날의 반짝임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밤샘으로 피곤했던 시험기간이나 과제의 스트레스도 통통한 김밥 한 줄이면 다 괜찮았던 그 시절의 나는 단순했던 것일까, 아니면 가까운 곳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일까.


어쩌면 나는 그저 김밥을 참 많이 좋아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없어진 그 김밥은 내게 지나간 대학시절만큼이나 때때로 생각나는 그리운 존재가 되었다.


유사한 김밥집을 찾아다니고, 입덧을 할 때 학교의 김밥이 생각났다던 수많은 졸업생들의 이야기로 미루어보건대, 아마 그 김밥은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청춘들의 고단함을 어루만져주고 추억의 한 페이지에 자리하고 있으리라.


대학시절 김밥이 아무리 맛있다고 해도 이 김밥을 이길 수 있을까.


아주 어린 시절부터 디엔에이에 새겨진, 누군가의 사랑과 정성을 가득 담아야만 맛이 나는 그것.

'집 김밥'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특별한 비법 재료가 있는 것도 아닐진대 유독 집 김밥만큼은 평소보다 훨씬 많이 먹게 되는 것은 집 김밥만이 가진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많은 이들이 집 김밥의 신비를 경험해보지 않을까.


소풍이나 운동회 때면 소풍과 운동회 자체 보다도 엄마가 싸준 김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더 신이 났던 어린 시절의 나.


어린 마음에도 도시락통 속 김밥에 새벽부터 김밥을 싸며 딸을 생각했을 엄마의 사랑이 더욱 각별하게 느껴졌기에 그 순간을 기대했을 것이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생일에, 축하할 일이 있거나 기운 내라고 응원하고 싶을 때 엄마는 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김밥을 싸주곤 한다.


한 줄 한 줄 시간을 들여 완성된 그 김밥은 언제나 나에게 최고의 선물이고 위로이자 응원이 되는 것이다.


그 마음을 알기에 엄마의 김밥은 내게 어느 김밥보다도 맛있고 소중한 음식이자 사랑이다.


기억을 떠올리다 보니 나는 김밥의 맛도 좋아하지만, 그보다 김밥을 먹으며 누군가와 함께 한 시간, 치열하게 살아갔던 빛났던 청춘을.

그리고 기꺼이 김밥을 쌌을 엄마의 마음을 아끼고 그리워하며 애틋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가득 담긴 검은색 김밥이 먹고 싶어 지는 가을이다.


소박하지만 정성이 담긴 그 음식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가을이다.


그리고 김밥에 담긴 사랑, 그 사랑의 마음을 나 또한 나누겠다 마음먹게 되는 가을이다.

이전 02화 흰색: 사랑의 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