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천천히, 또렷하게 강해지고 있었다.
세상 모든 시간이 나만 비껴가는 것 같았다. 몸과 마음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느껴지는 날이 자주 있었다. 어디 여유 있게 앉아있는 사람을 보면 부아가 치밀었다. 저 여유가 왜 나한테는 없느냐는 마음. 그야말로 바닥 감정이었다. 일을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루면 끝낼 일을 며칠씩 붙들고 있었다.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모든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던 때. 누가 건드리기만 하면 곧 폭발할 기세였다. 저녁에 만나자는 제안은 흘리거나 얼버무렸다.
시도 때도 없이 칭얼대는 건 미성숙의 증거일 수 있지만 도무지 못 견디는 상황을 표현조차 안 하는 건 위험신호일 수 있었다. 가끔은 서로 징징대지 않으면 살 수 없으니까. 우리는 영원히 혼자일 수 없고, 그야말로 연대의 신호이자 관계의 증거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런 상태가 며칠이고 지속되면 누구한테 의지하거나 호소할 에너지도 사라졌다. 말 수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징징거릴 힘조차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징징거려 봤자 허공처럼 느껴질 때는?
기댈 수 있는 사람 한 명이 곁에 없다고 느껴지는 날이 점점 늘었다. 누가 얼마나 가까이 있느냐는 문제가 아니었다. 보고 싶은 사람은 많았다.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관계없이 고립되고 있었다.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은 얼음처럼 굳어있었다.
그즈음에 요가를 수련할 땐 어딘가에 중독된 사람 같았다. 요가원은 거의 유일하게 따뜻한 장소였다. 꽁꽁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기꺼이 녹일 수 있는 에너지, 위로, 의지, 위안의 공간이었다. 수련만 하면 모든 게 조금씩 나아졌다. 쌓였던 피로는 거짓말처럼 가셨다. 마음에도 작은 틈이 생겼다. 그 틈 사이로 더러운 것들이 빠져나갔다. 깨끗해지면 능률이 올랐다. 밀려있던 일을 해치우면서 그걸 성취감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소득도 없이 매일 바빠지기만 하던 때. 일주일 내내 딱 한 시간의 수련을 못할 때도 너무 많았다.
몸이 망가지는 건 아주 느리지만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일단 수면의 질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무거웠다. 몇 시간이나 더 자고 일어나도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몇 번이나 기지개를 켜도 개운하지 않았다. 아주 작은 손들이 내 몸 안에서 근육 하나하나를 움켜쥐고 흔드는 것 같았다. 키도 더 작아진 것 같았다. 이러다 아주 웅크린 것처럼 영원히 작아지다 소멸해버리면 어쩌지? 몸 구석구석의 모든 긴장이 형편없이 풀려서 늘어져 있었다. 걸을 때마다 몸과 마음이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불쾌, 자괴, 무력으로 끌려가듯 시작하는 하루. 이런 날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미스터리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누가 죽이는 줄도 모르고 죽어나가는 공포영화. 저녁까지의 시간은 오로지 버티기였다. 심리적으로도 움츠러들고 마음도 엉망진창인 채 며칠이나 흘려보냈다. 회생의 의지조차 흉터처럼 희미해졌다. 요가를 하든 못하든 인생은 엉망이라고 생각하는 단계의 문턱까지 끌려가는 것이었다. 이쯤 되면 요가원에 갈 의지조차 꺾여 있었다. 가만히 누워있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한 시간쯤 눈 감고 일어나면 가까스로 책을 집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읽는 게 아니었다. 잠들기 직전까지 끝도 없는 불행의 나선형 계단을 지하로 질주하는 기분이 이어졌다. 아침이 되면 같은 하루의 반복이었다.
24시간 중 한 시간도 내 마음대로 움직이고 숨 쉴 수 없는 삶. 그렇게 살아도 내 안에 쌓이는 게 별로 없다는 허무에 이 모든 감정의 근거가 있었다. 시간과 감정과 돈을 쓰면서 스트레스를 얻는 일상. 내가 소모하는 시간과 나를 소모하는 시간이 총합이 하루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바쁘다’는 말만 늘 새로워졌다. 딱 그만큼 바빴던 하루가 한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몇 배는 바빠지는 날이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왔다. 분명히 한계치 이상의 일을 해냈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몇 배의 일을 하루에 처리해버리는 날이 또 태연하게 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하루하루 늙어가고 있었다. 어제는 후배한테 이런 전화를 받았다.
“선배! 나 진짜 몇 년 만에 요가하고 집에 가는 길이에요! 이렇게 개운하고 좋다, 진짜. 이게 사는 거지!”
“너무 좋겠다! 나는 지금 며칠째 못 하고 있어. 이번 주에는 한 번도 못 갔네?”
“응응! 안 그래도 선생님들이 선배 언제 오냐고 물어보시더라.”
2주 전에 퇴사한 후배였다. 과로와 스트레스로 망가지고 또 망가졌던 리듬을 천천히 회복하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퇴사가 모두의 해답이 될 수는 없지만, 회사가 딱히 보장해주는 것도 없는 시대. 견딜 수 없는 수준까지 밀어붙이다, 거기서 숨도 못 쉬고 헉헉대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일단 그만두는 것이 일단의 답인 때이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허투루 살아오지는 않았으니까, 이대로 가라앉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은 있었다. 그런 식으로 위험부담을 감수한 후에야 한숨 크게 돌릴 수 있었다.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기약도 없고 이대로 계속할 수도 없는 시대의 우리가 다시 숨을 고르는 방법이었다.
수련할 때도 호흡이 자주 가빠지곤 했다. 어려운 자세를 만나거나 힘이 과도하게 들어갔을 땐 숨을 멈추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의 “호흡하세요” 한 마디가 단호하게 들려왔다.
“호흡할 수 있는 곳에 머무세요. 호흡이 가장 중요해요. 숨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호흡하세요.”
‘흡’하고 멈춘 상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의식적으로 다시 숨을 쉬는 것뿐이었다. 입은 다물고, 다시 코로 공기를 마시고 내쉬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경직됐던 근육에도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음에는 여지, 몸 안에는 공간이 생겼다. 자세가 깊어지면서 마음도 평온해졌다. 그걸 물리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호흡은 점점 더 깊어졌다. 몸과 마음의 모든 더러운 것들이 숨 안에서 깨끗해지고 있었다. 발전의 선순환, 호흡의 힘, 신비로운 순간이었다.
사무실에서도 비슷했다. 누가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했을 때, 내 시간을 자기 시간처럼 생각하는 윗사람을 미쳐 피하지 못했을 때, 자존감이 심각하게 낮은 나르시시스트가 밑도 끝도 없이 징징대는 소리를 마주한 후에는 내 자리로 돌아와 눈을 감았다.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하자고 다짐하면서 내 숨소리에만 집중했다. 예의 없이 치고 들어오는 일을 처리하는 것도, 형편없는 타인을 상대하는 일도 딱 여기까지만 하자는 작은 다짐이자 소극적 대피였다. 과호흡증후군을 진정시킬 때 그러는 것처럼 두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내가 내쉰 이산화탄소를 조금 더 마시려고 하기도 했다.
나를 아끼지도 않으면서 이용만 하려는 타인한테는 휘둘리지 말자, 스쳐가는 것과 영원한 것을 정확히 구분할 수 있는 힘을 기르자, 지금 내 앞에 있는 일에 일단 집중하자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마음의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호흡에 집중하면 다른 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 숨은 내 숨, 이 삶도 내 거니까. 나는 내 힘으로 지켜야겠다는 다짐이 숨 안에서 단단해졌다. 그렇게 마음의 면적을 넓혀 놓은 상태에서 아까의 분노를 들여다봤다. 가까스로 작아 보였다. 그때 다시 내쉬는 숨. 큰 안도의 숨. 한 번은 도망치듯 요가원으로 뛰었던 적도 있었다.
“저, 정말 죄송한데 한 시간 반만 자리 비울게요. 괜찮을까요?”
그때 회사와 요가원의 거리는 도보로 10분, 뛰면 5분 안에 갈 수 있었다. 그렇게 뛰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매트를 깔았다. 호흡을 가다듬고 몸을 풀었다.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면서 다시 숨을 쉬었다. 돌처럼 굳었던 몸이 천천히 풀리는 걸 지켜보면서, 얼음처럼 차가웠던 마음에 온기가 돌기 시작하는 걸 느끼면서 나는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다. 바닥난 배터리를 충전하듯, 물 한 모금으로 몇 날 며칠을 연명해야 하는 사람처럼 간절했던 수련이었다.
요가는 긴장과 이완, 수축과 팽창, 분노와 평화 사이에서 영원히 이어지는 담금질 같았다. 시간을 쪼개서 가까스로 하는 수련도 나를 조금씩 강하게 만들고 있었다. 수련을 멈추지 않는 한 넓어진 마음이 다시 좁아지지 않았다. 한 번 단단해진 근육이 다시 약해지는 일도 없었다. 현재도 미래도 선명하지 않을 때, ‘내가 조금씩 강해지고 있다’는 확신만큼 강한 의지가 또 있을까? 그동안 나는 회사를 그만둘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람이 되었다. 혼자서도 조바심을 내지 않을 만큼, 애꿎게 징징대지 않을 만큼. 이별을 이별로,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이었다.
글/ 정우성
그림/ 이크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