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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 Jun 12. 2022

제주도,김영하,여행의 이유

아무리 감성충이라고 해도 책 읽다 눈물이 난 적이 없었던 거 같은데

이게 과연 북리뷰인지 여행 후기인지 일기장에 적을법한 마음의 소리가 될지 모르겠는 사적이고도 사적인 글이 될 거 같아서 망설였지만, 이런 류의 글은 안쓰겠노라 다짐했지만 그래도 기록해본다. 어릴적부터 동네에서 같이 초등학교 중학교 다녔던 꼬꼬마 친구들이라고 명명하는 친구들과 1년만에 제주도로 다시 여행을 갔다. 작년에는 곧 결혼하는 친구가 있어서, 결혼 하기 전 마지막 여행으로 4명이 갔던 제주도였는데 딱 1년 뒤에는 3명이 왔다. 이런 순간들에 진짜 내가 나이를 먹었구나 실감한다. 


날씨도 환상적이였고 너무너무 모든 것들이 완벽했던 글램핑장에서 하룻밤을 행복하게 잤다. 다음날 아침에 페달 카트를 타다가 너무 쌩쌩 달려서인지, 내 카트는 비탈길에서 고장이 나버렸다. 결국 도움을 요청했고, 스태프 직원이 와서 내 카트를 끌어갔다. 나는 친구들이 카트를 다 탈때 까지 혼자 덩그러니 길바닥에 남겨졌다. 혼자 뭐하지 하다가 오두막(?)같은 공간이 있어서 들어갔는데 왠걸 책을 읽도록 꾸며진 공간이였다. 


낯선 공간에 오게 되면 익숙한 것들을 먼저 보인다고 했던가, 전에는 감흥이 없어서 읽다 덮었던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 가 눈에 들어왔다. 알쓸신잡이 처음 나왔을때 그 프로그램의 플롯 구성이나 시사 교양적인 내용들을 쉽게 풀어내는 것이 기존에 없던 방식이라 완전 흥미롭다 생각하고 봤었었는데, 그 때 김영하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래서 김영하 책을 찾아봤었고 마침 신작으로 나왔던 '여행의 이유'를 읽었는데 몇 장 안읽고는 유명세에 비해 내 취향에는 맞지 않는 작가라 생각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불시착한 곳에서 마땅히 할 게 없었고 별 기대감 없이 다시 책을 펼쳤다. 


몇년 전에, 덮어버렸던 책이, 뜻하지 않게 우연히 다시 마주한 오늘엔 내 마음을 울려버렸다. 아니 진짜로 책을 읽다가 눈물이 흐르는 진귀하고도 진정한 찐감성충의 경험을 하게 했다. 사실 감성충이라고 놀림 받기는 했지만 영화를 보다 운적은 많아도 진짜 책읽다 눈물이 난 적은 언제였지 싶을만큼 오래됬다. 심지어 모르던 녀석도 아니고 전에는 별거 없다고 생각한 녀석에게 서든어택을 당하다니! 


유난히 책을 좋아하고 많이 보는 거 같은데, 왜 그럴까 또 이과생임을 못 숨기고 나름 과학적으로 추측해보건데, 어렸을 때 엄마가 3~4살 무렵부터 혼자 책을 재밌게 읽을 수 있기 전까지 꽤 오랜기간동안 자기 전마다 꼭 책 한권씩을 읽어줬다고 했다. 나에게도 엄마가 책을 읽어주던 기억들이 선명하게 존재한다. 


어릴적 에피소드 중 엄마가 가장 인상깊게 기억하는 것 중 하나가 나에게  '미운 오리새끼'책을 읽어 주면 몇번이고 그 이야기가 슬프다고 우는 내가 재밌었다고 추억했었다. 그래서 이제 다크다 못해 늙어버린거 같은 아직도 툭하면 잘 울고, 감수성이 풍부한 거 같다. 정글과도 같던 스파르타 고등학교에서는 나약하게만 보이는 이런  나의 모습이 약점(?)이자 고칠 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더 나이를 먹고 사회생활도 하면서, 툭하면 잘 우는건 사실 여전히 별 도움이 되지 않고 마이너스지만, 눈물을 통해 훌훌 털어버리고 망각을 하는데에는 큰 도움이 되어 내 자신의 정신건강에는 이로운거 같으며 감수성이 풍부한 것 역시도 감성충으로 놀림받기 일쑤였지만, 같은 순간을 경험하더라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일상을 영감으로 변환시키는 나만의 무기가 되주기도 한다. 




P18~20) 클래식 연주자들이 비발디의 <사계>나 쇼팽의 <야상곡>같은 대중적인 곡들로만 레퍼토리를 짤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음식 주문에서 실패를 줄이고 싶다면 모든 분류의 가장 위부터 고르면 되고, 재료로는 닭을 선택하는 것이 안전하다. 겉에 뭐가 발라져 있든, 무엇을 재웠든, 속에는 우리가 아는 그 닭고기가 있다. 


그러나 자기 여행을 소재로 뭔가 쓰고 싶다면 밑에서부터 주문해보는 게 좋을 것이다. 때론 동행중에서 따라 시키는 사람이 생기고, 그 인상적인 실패 경험을 두고 두고두고 이야기 하게 될 것이고 누군가는 그걸 글로 쓸 것이다. 대부분 여행기는 작가가 겪는 이런 저런 실패담으로 구성 되어 있다. 계획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오는 그런 여행기가 있다면 아마 나는 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행기란 본질적으로 무엇일까?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 오는 것이다. 마르코 폴로는 중국과 무역을 해서 큰돈을 벌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여행을 떠났지만 이 세계가 자신이 생각해왔던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 세상에는 다양한 짐승,문화,제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와 그것을 '동방견문록'으로 남겼다. 


(중략)


주인공들은 험난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추구의 플롯의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의 결말이다. 결말에 이르러 주인공은 원래 찾으려던 것과 전혀 다른 것을 얻는다. 대체로 그것은 깨달음이다. 길가메시는 '불사의 비법' 대신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통찰에 이른다.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귀환한다는 애초의 목적은 달성했지만 그 긴 여정을 통해 그가 진짜로 얻게 된 것은 신으로 표상되는 세계는 인간의 안위 따위에는 무심하다는 것, 제아무리 영웅이라 하더라도 한낱 인간에 불과하며, 인간의 삶은 매우 연약한 기반위에 위태롭게 존재한다는 것, 환각과 미망으로 얻은 쾌락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것 등을 깨닫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오디세우스는 처음 길을 떠날 때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고향인 이타케에 도착한다.  




내가 약점이고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느날에는 나만의 필살기가 되어주기도 하고 여행의 이유 책처럼 전에는 별로 마음에 와닿지 않다고 여겼던 책이 나를 울려버리기도 한다. 이번 제주도 여행도 그렇다. 높은 경쟁률로 예약이 어려운 글램핑장 예약을 성공해서 가야되니까 반강제로 날짜를 맞춰 오게 된 그런 여행이였지만 어느새 그 맘때쯤이 되니, 너무나도 필요했던 일상으로부터의 해방 여행이 되버렸다. 


역시 세상 일을 내가 다 안다는 듯, 우쭐해서 너무 쉽게 판단해버리는건 어리석고도 오만한 짓이라는 것을 또 한번 깨닫는다. 그저 주어진 순간 순간을 마음을 다해서 경험하고 후회없이 훌훌 보내줘야지 라는 생각을 들게하는 그런 여행이였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 온 지금, 여전히 변한건 없고 녹록치 않겠지만은 그래도 쉽게 판단하거나 평가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마음을 다해 나에게 주어진 이 순간들을, 그 뜻밖의 여정들을 즐겨봐야겠다


p.s 마지막은 책 표지에 적힌 문장이, 나에게도 이번 여행의 이유였던거 같아서 기록

"풀리지 않는 난제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 소란한 일상으로 부터 벗어나 홀로 고요하고 싶을 때, 예기치 못한 마주침과 깨달음이 절실하게 느껴질 때, 그리하여 매순간 우리는 여행을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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