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몰입'이라는 책을 보다가 새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는데, 우리가 인생에서 일하고 잠자는 시간 외에도 '출근하는 시간, 밥 먹는 시간, 화장실 가는 시간' 등 정말 다양한 시간들을 많이 소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즉,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꼭 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는 말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화장실도 가고 밥도 먹고 출근 준비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좋아하는 것만 하는 삶'은 없다. 존재할 수가 없다. 위에서 말했듯이 어떤 인간이든 '해야 하는 일'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하는 것 외의 시간에 자신이 좋아하는 일로 가득 채우는 사람은 있다. 좋아하는 것에 파묻혀 사는 삶은 분명히 있다.
30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본인은 다행히도 직업이 있다. 밥벌이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작고 소중한 월급이지만 매월 꾸준히 받고 있다. 나 한 몸 건사하기에는 충분하다. 밥벌이로 하고 있는 일은 좋아하는 일이라기보다 그나마 내가 잘하는 일이다. 남들 앞에서 강의하고, 가르치는 일은 내가 꽤 잘한다.
퇴근하고 혹은 주말에는 내가 좋아하는 일로 가득 채우고 싶었다. 하지만, 망설여졌다. 그냥 하면 되는데 왜 망설였을까... 혹자는 이해 못 할 수도 있지만, 젊은 나이에 벌써 너무 만족하고 나 좋아하는 일만 하면 뭔가 도태되고, 지금 이 나이에는 늙어서 하지 못하는 공부 같은 것이나 커리어를 쌓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생각은 부모님의 영향이 큰 것 같다. 대학원 석, 박사나 전문직 공부 같은 것들은 나이가 들면 하기 어려우니 젊었을 때 많이 하라는 부모님의 생각이 나에게 슬며시 전해진 것 같다.
그래서인지 글 쓰고 그림 그리면서 만족은 크게 느끼지만 만족감이 커질수록 '지금 내가 이럴 때가 맞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참 어렵다. 어차피 밥벌이로 '해야 하는 일'을 잘하고 있는데 퇴근하고 나서 까지고 '해야 하는 일'에 파묻혀서 살고 있던 것이다. 그저 좋아하는 일은 늙고, 은퇴한 후에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책임감 있게 밥벌이도 하고 해야 하는 일도 잘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는 시간에는 좋아하는 일 좀 해도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인생은 한 번이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지금 만족을 못 느끼면 나중에는 더 느끼기 힘들 것이다. 개인적으로 남들에게 표현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건 마치 본능과도 같다. '숨 쉬는 것'과 비슷하다. 숨은 참을 수 없다.
내가 원하지도 않는 공부와 카레에 신경 쓰느라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에 너무 소홀했다. 내 인생에 소홀했다. 귀한 내 인생과 시간을 소비했다. 공장의 부품처럼 의미 없는 반복만 지속하면 정서적으로 소진된다. 나는 나에게 의미가 있어야 하는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다. 앞으로는 직업과 커리어로 인정받는 형식보다는 나의 표현과 성장으로 인정받고자 한다. 인정 못 받으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앞으로는 좋아하는 것에 파묻혀 살고자 한다. 결과물이 안 나와도 좋다. 그래도 나는 나의 정체성은 스스로 지키는 삶을 산 것으로 만족한다. 내가 지금 하는 행동들은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일 것이다. 내 안에 잘 쌓아놓으면 된다. 언젠가는 빛을 발할 것이다. 마치 10년을 기다린 손흥민의 트로피처럼 말이다. 어차피 내 마음처럼 잘 되지 않는 인생이다. 그 하루 중에서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해 본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애초에 성취나 성공을 위해 태어난 존재도 아니다. 많은 우연들에 의해서 태어났을 뿐이다. 다윈의 진화론에서 말한 것처럼 변화에 살아남은 것들만 지금 존재하는 것이다. 오히려 큰 성취나 큰 성공은 나의 노력과 시대의 운이 만나야 하는 것이다. 운의 영역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니 하다 보니까 터지는 것이지 터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건 크게 의미가 없다.
성취나 성공에 매몰된 삶을 살면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성취, 성공에 도달하기 어렵다.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은 변수가 많기에 나의 노력으로만 성공하는 것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성취, 성공에 도달한다면 또 다른 목표를 위해 달려야 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본질적으로 원하는 게 아니면 성취, 성공을 해도 공허할 것이다. 그럼 되돌리기가 너무 힘들다.
즉, 어쩌다 보니 태어난 것이지 우리가 애초에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태어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꾸역꾸역 살아나가고 있다면 그 자체로 목적은 달성한 것과 다름없다. 오늘 하루 잘 살아냈으면 그것만으로 내 존재 목적은 다 채운 것이다. 더 높은 목적이나 의미는 없다.
근데 현대사회,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각은 복잡하다. 단순하지 않다. 생존 그 이상을 원한다. 사회적 성취, 돈.. 항상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한다. 타자나 부모의 인정을 받기를 원한다. 사실 그것은 스스로 만든 잘못된 신념이다. 이 믿음을 일찍 깨부술수록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만날 확률이 높아진다. 정신 똑바로 안 차리면 남이 원하는 대로 인생을 살게 된다.
내가 지금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못한다고 해서 하루하루를 대충 살라는 뜻은 아니다. 스스로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보내야 한다. 하루하루 만족스럽게 사는 태도는 더없이 필요하다. 그 와중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고, 그걸 하는 시간을 늘리면 된다. 인생을 누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지구 입장에서는 사실 내일 내가 사라져도 이상할 게 없다. 지금도 누군가는 태어나고 죽는다. 생명이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나도 언젠가는 사라진다. 그러니 사라지기 전까지는 최대한 누리고 즐겁게 살면 좋지 않겠는가.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그저 좋아하는 것을 많이 하려고 노력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