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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드id Sep 02. 2019

회사 벽 뜯고 100만 원 물어낼 뻔한 신입사원

'그때 그 시절, 그때 그 추억이 문득 그리워지는 날'


입사한 지 5개월 차 어리바리 사원 시절의 사건이다. 입사 후 처음으로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됐다. 회사 캐릭터를 만드는 업무였다. 몇 개월 동안 업체와 미팅하고 팀 회의를 통해 어느 정도 윤곽을 잡았다. 며칠 뒤 최종 시안 4가지가 나왔다.


  대표이사 보고 전 마지막 관문인 임직원 선호도 조사를 했다. 지금 같았으면 온라인으로 손쉽게 진행했을 텐데, 2006년에는 스마트 폰도 없던 시절이었다. 사무실이 위치한 7, 8층 엘리베이터 옆 벽면에 4개의 보드를 붙였다. 직원들이 마음에 드는 캐릭터에 스티커를 붙이는 방식이다.


  연말이라 조사 기간에 연휴가 끼었다. 그래서 담당자인 나는 보드가 떨어질까 봐 가장 강력하고도 굵직한 양면테이프로 꼼꼼하게 붙이고 온 힘을 다해 꾹꾹 눌렀다. 새해가 돼 출근했는데도 보드는 얌전히 잘 붙어 있었다. 다행이었다. 며칠 뒤 선호도 조사가 끝났다.


  보드를 제거하려는데 보드는 마치 원래 벽이었던 듯 꿈쩍 안 했다. '뭐지?' 당황스러웠다. 한겨울이었음에도 등줄기로 땀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떨어질까 봐 꾹꾹 눌렀던 그 힘을 역으로 발휘에 잡아당겼다. 별 반응이 없었다. 있는 힘껏 잡아 뜯었다. 순식간이었다. 하얀 벽 뒤에 숨어 있던 갈색(페인트와 벽 뒤의 합판이 뜯겨나감) 속살이 드러났다. 귀신에게 홀렸던 걸까. 7, 8층 벽을 다 걸레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 그런 내 모습을 출근하던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누군가 크게 말했다. "건물 시설 담당자를 불러!" 뭔가 잘못됐다는 걸 그때서야 깨달았다.


  팀장은 너무 무서운 이었지만, 그 순간 생각나는 사람은 팀장님밖에 없었다. 하늘도 무심하지. 출장 중이다. 선배 조언에 따라 빌딩 시설팀에 연락했다. 건물을 훼손했다고 욕만 얻어먹었다. 원상 복구를 해 놓으라고 했다. 팀장님께 전화했다. 인사팀 시설 담당에게 얘기하라고 조언해 주었다. 친분 있던 담당자에게 연락해 상황을 설명했다. 잠시나마 슬쩍 떠넘기고 세상에서 제일 긴 하루를 보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퇴근 무렵 인사팀 담당자가 찾아왔다. 층별 보수 비용이 50만 원. 합이 100만 원이라고 했다. 뜯긴 부분만 보수하면 얼룩이 생겨 벽 전체를 다 도색해야 한다는 전문가 진단이 내려졌다고 전해줬다. 담당자가 떠나자 해당 부문 상무님이 친히 전화했다.


  "니 돈으로 보수해라. 그리고 시말서 써서 제출하도록."


  세상은 냉정했다. 냉담한 통보다. 시말서라는 단어를 찾아봤다. 드라마에서나 등장하는 말인 줄 알았다. 생애 첫 시말서라 인터넷을 뒤져가며 정성스럽게 작성했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퇴근했다.


  시말서에는 팀장 사인을 받아야 한다. 다음날 팀장님이 출근했다. 상황을 설명하고 시말서를 들이밀었다.


  "팀장님… 저… 여기에… 싸인 좀…. 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불같은 성격의 팀장님은 그 자리에서 시말서를 찢어버리고, 상무님께 전화했다.


  "상무님, 애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일하다가 그런 건데 이렇게까지 하는 건 아닌 거 같습니다."


  상무가 더 높으니 팀장도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통화를 마친 팀장님은 신경 쓰지 말라는 세상에서 제일 듣고 싶은 말을 전했다. 안심하고 또 안심했다. 그런데 며칠 동안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신경이 쓰였다. 여기저기서 한 소리할 거 같아서 불안했다. 가장 걱정했던 건 '사장님이 보시고 한 소리하면 어쩌지…'라는 생각이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무거운 마음으로 주말을 보내고 출근했다. 걸레가 됐던 벽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해져 있었다. 신선한 페인트 냄새가 새삼 향기로웠다. 향긋한 향기를 타고 벽 난도질 사건은 조용히 날아갔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별의별 일을 다 겪는다. 그런데 이 사건은 입사하자마자 벌어진 일이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가장 또렷한 건 팀장님이 상무님께 전화해서 하신 말씀이다. 그 당시 팀장님은 현재 멋진 임원이다. 여전히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로 직원들 고충을 해결해 주고 있다.


  그때 그 시절, 그때 그 추억이 문득 그리워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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