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과삶 Nov 05. 2022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연결되더라

직장인 철학자

진로 적성과 전혀 상관없는 프로그램 개발자의 삶을 우연히 선택했습니다. 아니 그 전에 고등학교 2학년 때 이과를 선택한 것부터가 문제였어요. 수학을 좋아했고 뭐든 딱딱 결과가 떨어지는 논리적인 사고를 하는 저는 이과 성향일지도 모르겠어요. 글마저 딱딱한 논리로 가득하니까요. 대학 4년 내내 미적분, 물리학, 무기화학 등 숫자와 논리로 가득한 이성의 세계를 맴돌았습니다.


기초지식 때문일지 몰라도 나름 개발을 잘했고 디버깅도 제법 능숙했어요. 매뉴얼을 살피며 꼼꼼하게 파고들어서 동료 프로그램의 오류까지 찾아줬어요.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전문가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주니어 개발자였습니다. 고수 개발자를 경쟁 상대로 여기며 따라잡으려 했으나 넘지 못할 산이었죠. 자존심이 상한 저는 개발이 적성에 맞지 않는 직무라는 핑계를 대며 다른 길을 모색했어요.


완전히 새로운 직무를 맡기는 어려우니 IT 엔지니어 분야 안에서 다양한 업무에 도전했습니다. 서버 프로그램 개발, 클라이언트 프로그램 개발, 사내 IT 관리, 개발 PM(프로젝트 매니저)을 거치며 맛보기 여행을 다녔어요. 그 어느 곳도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지만 말이죠.


모바일 쿠폰을 다운받아 마트에서 보여주면 할인받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프로젝트를 맡았습니다. 당시 모바일 쿠폰은 핫한 아이디어였지만 쿠폰 이미지 하나 다운받는데 1분 이상 걸렸어요. 설상가상으로 얼마 전 카카오 먹통과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몰려든 사람 덕분에 시스템이 멈춰버린 거죠. 클라우드(Cloud)가 있었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로드 밸런싱(Load Balancing)이나 부하 분산 같은 개념조차 없던 때였습니다.


화가 난 고객은 데이터 센터로 "다모여"를 외쳤습니다. 개발 PM인 저를 포함해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데이터베이스, 개발 담당자 모두 데이터 센터로 달려갔습니다. 고객은 문제의 원인을 찾기 전까지는 아무도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엄포를 놨어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듯 밤새 난상토론이 오갔습니다. 결국 갑을병정 라인에서 가장 끝 쪽에 있는 업체가 책임을 떠맡았어요. 밤을 지새운 다음 날 오후 파김치가 되어서야 데이터 센터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쉬지도 못하고 바로 회사에 보고하러 가야만 하는 상황에 환멸을 느꼈습니다.


그 이후 공포의 "다모여"는 트라우마로 남았습니다. 핸드폰이 울릴 때마다 가슴이 벌렁거렸어요.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사는 데 진절머리가 났습니다. 휴가 일정을 잡았다가도 고객이 부르면 취소해야만 했거든요. 명절에 전을 뒤집다가도 회사로 달려갔어요. 혹시라도 장애가 날까 봐 노심초사하느니 안정적이고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때부터 커리어 고민을 시작했죠.


삶을 성찰하려면 거리를 둬야 한다. 자기 자신을 더 명확하게 들여다보려면 자신에게서 몇 발짝 물러나야 한다. 이렇게 거리를 둘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철학과 대화는 사실상 동의어였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중에서


대학 졸업 후 쉴 새 없이 달려오던 저는 잠시 멈추고 저에게서 벗어나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내가 잘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언제 행복한가? 누가 가장 부러운가?'


좋아하고 잘하고 행복한 것은 모르겠지만 부러운 사람은 떠올랐어요. 모토로라코리아에 경력사원으로 입사했을 때 모토로라 유니버시티 소속의 차장이 회사 설립자 소개와 역사를 소개하던 모습이었습니다. 신규 입사자 교육 같은 건데 뭐가 그리 있어 보였을까요? 그녀처럼 교육담당자(Human Resources Development, HRD)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습니다. 연말 회사 조직개편에 인사팀 상무에게 찾아가 한 자리 달라고 맞짱을 떴어요. 상상할 수도 없는 용기가 "다모여" 트라우마 덕분에 샘솟았습니다.


트라우마와 용기에 힘입어 아직 교육 일을 신나게 합니다. 일과 비밀 연애를 시작했는데 동료들이 다 알아차려 공개 연애가 되고 말았습니다. 좋아서 일하는 게 느껴진다고들 말합니다. 시키지 않아도 일을 벌이고 혼자 좋아라 해요. 평일 저녁에도 주말에도 기꺼이 일합니다. 강의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 신나서 어떤 희생이라도 치릅니다. 일하는 만큼 보상 받지 못해도 헤벌쭉 웃지요. 


'만일 처음부터 문과로 지원해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교육담당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면 이 일을 지금처럼 사랑했을까?'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어느 날 CTO(Chief Technology Officer, 기술 임원)를 찾아가 개발하겠다고 생떼를 부릴지도요.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다시 말해서, 앞을 보면서 점을 연결할 수 없습니다. 뒤를 돌아보고서야 점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래에 점이 어떻게든 연결될 거라 믿어야 합니다. - 스티브 잡스의 2005년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 축사 중에서


커리어와 관련하여 사람들은 스티브 잡스의 '점을 연결한다(connect the dots)'는 표현을 많이 언급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앞을 보면서는 점을 연결할 수 없다는 겁니다. 저는 앞을 바라보며 점을 찍지 않았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돌아돌아 어찌어찌 연결되어 교육담당자가 되었어요. 이 점이 미래의 기업교육에 한 획을 그을지도 모른다는 믿음이야 있지만 여기까지 올 줄 어찌 알았을까요? 


커리어로 고민하는 여러분, 북극성을 향해 일단 과감하게 앞으로 나아가요.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연결이 될 터이니, 걱정일랑 내려두고요.

이전 09화 살아남은 자의 슬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