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흔적
카페 창가에 앉아 바깥을 바라본다. 가을로 넘어가는 환절기, 보슬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우산을 든 사람들이 분주히 횡단보도를 건넌다. 서울은 조용한 지방보다 다양한 사람들을 관찰하기에 좋은 곳 같다.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묘한 전우애 같은 기운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사람들을 관찰하던중, 불쑥 생각 하나가 찾아온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무엇으로 판단할까?
대개 외모, 말투, 스펙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가끔은 그보다 더 본질적인 무언가가 보인다.
어린 시절 들었던 전래 동화.
여우와 곰 이야기다.
먹을 것이 없던 곰이 여우에게 도움을 청하자, 여우가 속여서 “꼬리를 얼음 구멍에 넣으면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말한다. 곰이 그대로 따라 하다 꼬리가 얼어붙어 끊어지고, 그래서 곰의 꼬리가 짧아졌다는 이야기다.
사람을 볼 때도, 여우 같은 기민함이 있는가, 곰 같은 묵직함이 있는가를 떠올리게 된다.
여우의 영리함은 때로 계산적이거나 속셈을 감출 수도 있다. 반면 곰의 힘은 답답해 보이기도 하지만, 단순하고 순박한 신뢰감을 주기도 한다.
여우와 곰의 이야기를 지나 또 다른 생각이 문을 두드린다.
사람은 향기로도 기억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를 판단하는 건, 그 사람만의 향기 같은 무의식적 흔적일지도 모른다.
특정 냄새가 무의식 속 기억을 강하게 끌어올려 생각과 감정을 자극한다는 개념이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프루스트 현상(Proust phenomenon)’이라 부른다.
비 냄새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샴푸 향기는 연인의 얼굴을, 집안 냄새는 가족의 온기를 떠올리게 한다.
또 다른 관점은, 사람의 습관도 은은히 정체성을 드러낸다.
작은 습관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주변에 ‘그 사람다움’을 남긴다. 웃는 버릇, 자주 쓰는 말투,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판단 기준까지도 포함된다.
길을 걷다 보면 또 하나 자주 보이는 습관이 있다. 손에 늘 쥐고 다니는 아메리카노다.
아메리카노는 본래 에스프레소에 물을 탄 커피다.
유럽,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진한 커피를 못 마시는 외국인(특히 미국인)을 위한 관광객용 커피’ 정도로 여겨졌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달랐다. 값이 저렴하고 양이 많으며, 빠른 생활 리듬과 제로 칼로리라는 다이어트 문화까지 더해져 아메리카노는 ‘국민 커피’로 자리 잡았다.
일터에서든 어디서든,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뜨아(뜨거운 아메리카노)는 현대 한국인의 일상 속 습관이다. 나 역시 하루 한 잔은 꼭 마신다.
향수처럼 사람을 각인시키는 아메리카노는 한국인의 집단적 향기일지도 모른다. 그 향기는 의도하지 않아도 그 사람을 기억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방식(Seinsweise)”을 일상 속에서 드러나는 행위와 태도에서 찾았다.
사소해 보이는 습관과 행동이야말로, 그 사람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표현이라는 뜻이다.
결국 사람은 외모나 스펙만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곰처럼 묵직한 힘, 여우처럼 기민한 꾀, 그리고 그 사람만의 향기와 사소한 습관들이 모여 무의식 속에 각인된다.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마도 그 모든 것의 합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