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나를 위한 비움

by 흐르는 물

용서, 나를 해방시키는 비움의 길

온전히 용서한다는 것은 곧 비움이다. 많은 사람들은 용서를 누군가에게 베푸는 고상한 행위, 상대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로 이해한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진짜 용서는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해방임을 알 수 있다. 내가 품고 있는 분노, 억울함, 원망을 놓아주는 순간, 가장 먼저 자유로워지는 이는 가해자가 아니라 바로 ‘나’다.


용서를 하지 못하면 나는 가해자와 끝없는 동거를 하게 된다. 그 사람을 마음속에 붙잡아 두는 순간, 나는 스스로를 가해자와 같은 방에 가둔다. 그 공간은 결코 평온할 수 없다. 매 순간 상대의 그림자를 쫓고, 마음의 창문을 닫아걸며, 숭고한 영혼의 빛을 스스로 고갈시킨다. 그렇게 나는 점점 나 자신을 잃어버린다.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은 생기를 잃고, 감정에 잠식당한 채 살아가게 된다. 마치 좀비처럼, 살아 있으나 살아 있지 않은 존재로 변한다. 좀비는 끝내 스스로의 상처에 삼켜져 다른 이를 물어뜯는다. 분노가 검붉게 흑화될 때, 그 독은 결국 주변으로 퍼져 나가 또 다른 상처를 낳는다.


그러나 인간은 원래 좀비가 아니다. 우리는 숨을 쉬며 살아가는 존재다. 몸은 폐로 맑은 산소를 들이켜야 생명을 유지하듯, 영혼 역시 맑고 투명한 숨결을 필요로 한다. 분노와 집착은 마치 습하고 악취 나는 지하실과도 같다.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영혼은 질식한다. 우리가 다시 살아나려면, 문을 열고 나와 환한 햇살과 신선한 공기를 맞아야 한다. 바로 그것이 ‘용서’라는 행위가 주는 숨결이다.



집착이 만드는 감옥

용서를 가로막는 가장 큰 힘은 ‘집착’이다. 에고는 집착을 통해 살아가기도 하지만, 동시에 집착 때문에 죽기도 한다. 여기서 집착이라는 단어를 찬찬히 음미해 보자.

執着(집착). ‘’은 붙잡음을 뜻하고, ‘’은 들러붙음을 의미한다. 결국 집착이란, 붙잡아 매달리고 놓지 못하는 상태다.


영어에서는 본딩(Bonding)이라 하여 ‘결합’, ‘접착’, ‘연결’을 의미한다. 원래 본딩은 따뜻한 연결, 서로를 지탱하는 유대의 힘을 뜻한다. 그러나 뒤집히면 끊지 못하는 속박이 되고, 삶을 왜곡하는 족쇄가 된다.


우리가 고통을 준 사람을 놓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가 잘못했다,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 내가 이렇게 아팠는데 그는 행복해선 안 된다”라는 집착. 그것은 정의로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나를 더욱 아프게 하는 또 하나의 족쇄다.



영혼마다 다른 길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더 깊은 차원의 깨달음으로 들어가야 한다. 모든 영혼은 저마다 각기 다른 구조와 소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온다. 어떤 영혼은 배움과 성찰을, 또 어떤 영혼은 사랑과 헌신을, 또 다른 영혼은 창조와 개척을 위해 이 땅에 왔다. 각자의 길은 다르고, 그 길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상대의 영혼이 가야 할 길에 자신을 억지로 본딩화하려 한다. 그의 삶에 매달려 나를 붙들어 두고, 그의 잘못을 내 삶의 중심축에 세워 버린다. 그러나 이것은 내 영혼을 버리고 상대에게 기생하는 역행이자, 본래의 생명 흐름을 거스르는 기이한 일이다.


나의 영혼은 나만의 길을 가야 한다. 그 길을 방해하는 집착과 분노, 억울함과 원망을 떨쳐내야만 한다. 텅 빈 마음, 비움의 자리에서만 나의 영혼은 다시 본래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 우리의 진정한 노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상대를 붙들고 흔드는 것이 아니라, 내 본래의 길을 되찾기 위해 나를 붙잡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치열한 내적 수련이다.



용서는 가해자가 아닌 나를 위한 해방

이 지점에서 우리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용서는 가해자를 위한 은혜로운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나 자신을 고통에서 놓아주는 행위다.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말은 사실상 ‘그를 내 마음에서 내려놓는다’는 뜻이다. 더 이상 그와 함께 같은 방에 있지 않고, 더 이상 그의 그림자에 나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결단이다.


이렇게 놓아버릴 때, 나의 에너지는 분노에서 자유로움으로 옮겨간다. 그 순간 비로소 숨이 트이고, 나의 영혼이 맑아진다. 마치 답답한 지하실에서 창문을 열어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처럼.



왜 우리는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 단순한 사실을 알면서도 쉽게 용서하지 못할까? 이유는 명확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정의’와 ‘보상’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내가 당한 고통이 정당화되고, 상대가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믿음은 인간 본능의 일부다.


그러나 인생은 언제나 정의롭게 흐르지 않는다. 가해자는 종종 사과하지 않고, 때로는 자신의 잘못을 끝내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때 나는 선택해야 한다. “상대의 사과가 있어야만 내가 자유로워지겠다”고 조건을 걸면, 나는 평생 자유로워질 수 없다. 그러나 “사과가 없어도, 정의가 완전히 실현되지 않아도, 나는 나를 위해 용서한다”고 선택한다면, 그 순간부터 자유가 시작된다.



용서는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용서하면 모든 것을 잊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용서는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다.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고, 그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상처를 더 이상 쥐고 있지 않는 것, 그것이 용서다. 기억은 남아 있어도, 나는 그 기억에 매달려 있지 않는다. 상처의 흔적은 내 삶의 일부가 되지만, 더 이상 나를 묶어두는 쇠사슬이 되지 않는다.


이것이 진짜 비움이다. 비움은 없앰이 아니라 내려놓음이다.



영혼의 호흡을 회복하는 길

용서의 또 다른 이름은 영혼의 호흡이다. 폐가 신선한 산소로 채워져야 몸이 살 듯, 영혼도 맑은 기운으로 숨 쉬어야 살아난다.


용서하지 못한 영혼은 늘 눅눅하고 어둡다. 원망은 곰팡이처럼 번식하고, 분노는 악취처럼 퍼져 나간다. 그러나 용서를 통해 비우면, 영혼의 창문이 열리고 햇빛과 바람이 들어온다.


그 바람이 내 영혼을 살린다. 숨을 고르게 만들고, 다시 살아갈 힘을 준다.



나를 지키는 용서

결국 용서란 상대를 위해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키는 길이다. 내가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내 영혼이 좀비로 변하지 않기 위해, 나는 용서해야 한다.


분노와 집착에 붙들린 사람은 스스로의 빛을 꺼버린다. 그러나 용서를 선택한 사람은 빛을 되찾는다. 다시 숨 쉬며, 다시 걸으며, 다시 삶을 노래할 수 있다.


용서는 결코 쉽지 않다. 때로는 평생에 걸친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조금씩 가벼워진다. 그리고 마침내 알게 된다.


용서는 타인을 위한 은혜로운 시혜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건네는 가장 위대한 선물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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