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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이병현 Jun 29. 2021

크리틱스컷: 픽사의 <소울>, 남들과는 조금 다른 리뷰

소울, 이렇게도 볼 수 있다고?

https://youtu.be/sLxJLAbwA1s


두 번째 유튜브 영상을 올렸습니다.

아래는 글 버전 리뷰입니다.




'22'를 옹호하며


최초의 반출생주의자 22번?

이 애니메이션엔 서사적으로 몇 가지 흥미로운 비틂(plot twist)이 있다. 일단 주인공이 죽으며 시작하는 것부터 그렇고, 1초당 1.5명이 죽는 세계에서 ‘영혼 1082억 1012만 1415번’ 다음으로 호명된 것이 ‘영혼 22번’이라는 건 관객을 꽤 놀래키는 지점이다. 22번 이후로 1082억 1012만 1393개의 영혼이 더 태어났는데, 그동안 22번은 꿋꿋하게 태어나지 않고 버틴 것이다. 이정도면 꽤나 굳건한 신념의 ‘반출생주의자’가 아닐 수 없다.

궁금한 것은 영혼에 숫자가 붙기 시작한 시점이다. ‘1번’은 대체 누구였을까?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일명 ‘루시’)였을까? 아니면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였을까? 어느 시점부터 ‘인류’라 명명하고 ‘1번’이니 ‘22번’이니 번호를 붙이기 시작했을까? 처음 ‘스파크’가 튀어 불을 사용한 순간부터 따지고 든 것이라면, 최소한 200만년 전의 원인류인 호모 에렉투스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정답은 이 영화의 제작진은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의 탄생 시점부터 번호를 붙이기 시작했단 것이다. 인구 통계학 연구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가 탄생한 기원전 5만년경부터 2015년까지 태어난 사람들의 숫자가 약 1082억이다.  

그러니까, 사실 ‘22번’은 쇼펜하우어나 데이비드 베너타는 물론이요 호모 사피엔스 최초의 반출생주의자가 태어나기 전인 기원전 5만년 전부터 이미 출생을 거부하고 있던 것이고, 따라서 후대에 탄생한 ‘반출생주의자’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조차 22번에게는 무례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식물이나 동물, 혹은 곰팡이, 세균, 바이러스에도 이렇게 영혼에 숫자를 붙여서 내보냈을까? 아니면 인류만 특별취급인 것일까? 고생인류와 원인류를 제외하고 현생인류부터 숫자를 붙인 걸 보면, 당연히 이 세계에선 호모 사피엔스만 영혼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 자의적인 설정 앞에서 나는 조금씩 맥이 풀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잠깐 반출생주의의 논점을 살펴보자. 데이비드 베너타에 따르면 논리는 간단하다.


반출생주의 논증:

어떠한 누군가가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 그 사람은 필히 고통(Pain), 혹은 기쁨(Pleasure)의 감정을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A. 고통의 존재는 부정적이다.

B. 기쁨의 존재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역으로 어떠한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A. 고통의 부재는 긍정적이다. (비록 그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객체가 없더라도, 고통 그 자체는 부정적인 것이므로)

B. 기쁨의 부재는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다. (단, 그 부재가 박탈이 아닌 경우. 그러나 존재하지 않은 객체이므로 박탈당할 수 없다.) 


따라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라는 것이 베너타의 주장이다.


이것은 그리 색다른 주장은 아닌 것 같다. 논점을 삶이 아닌 죽음으로 바꾸면 에피쿠로스의 첫 번째 논증과 별 다를 것이 없고(“죽음은 우리가 감각할 수 없는 것이라 나쁜 것이 아니며 따라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이데거 역시 인간 개인의 존재는 세상에 "던져짐(투)" "당한(피)"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러한 ‘피투성’은 실존주의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기도 한데, 물론 이와 쌍을 이루는 ‘기투성’, 즉 던져진 나 자신을 이제 나 스스로가 어디로 던지는가가 또한 실존주의 철학에서 중요한 개념이기도 하다. 쉽게 말하자면 어차피 태어난 인생 죽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상의 논점을 살펴보았을 때, <소울>은 실존주의 철학과 그리 다를 것 없이 삶의 의지를 다루는 교훈적 영화가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조와 22의 차이

두 번째 기회(second chance; 개과천선; 좀 비꼬자면 ‘중년의 위기’) 서사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꽤 큰 것 같다. ‘회한’이니 ‘후회’니 하는 단어 자체가 이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며, 최근 한국 웹소설 시장에서는 아예 ‘회귀물’이라는 서브장르가 생길 지경이다. 영미권에서도 이는 비슷한 양상이다. 특히 미국의 크리스마스 영화들이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 이후 시작된 전통인 걸까?). <소울>과 비교하자면 비슷한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는 작품인 <멋진 인생>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멋진 인생>은 잘 알려졌다시피 ‘주인공인 조지 베일리가 만약 태어나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을 통해 일종의 평행세계를 보여줘,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 말해주는 영화이다. 이를 통해 주인공은 자신의 인생이 무가치한 것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고, 두 번째 삶을 이어 나가게 된다. <소울>은 이런 전통적 소재를 유려하게 반복하는 영화이다.

그런데 내가 <소울>을 보면서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은 중년의 위기를 극복할 기회를 부여 받은 조가 아닌 22였다. 22가 비록 장장 5만년 하고도 2천년이 넘는 세월을 ‘유 세미나’에서 살긴(?) 했지만, 어찌됐건 공식적으로 22가 얻은 것은 ‘첫 번째 기회’이지 ‘두번째 기회’가 아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차이는 마치 별것도 아니라는 듯이 넘어가고 만다. 나는 ‘출생’과 ‘두 번째 삶’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고 가정하는 영화의 허술한 논리가 너무나 써서, 이 애니의 기술적 성취나 헐리우드답게 세련되게 세공한 각본이라는 당의정에도 불구하고 작품 자체를 삼키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물론 이 작품은 판타지이기 때문에 ‘22’는 스스로 ‘선택’해서 태어나기로 했지만, 사실 <멋진 인생>의 조지 베일리나 <소울>의 조와는 달리, 본래 ‘출생’이란 선택이 가능한 영역이 아니다. 기왕에 살던 인생을 개과천선해서 새롭게 산다는 선택지와 나는 인생을 한번 살아 보기로 결심했다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아예 태어나지 않는다, 라는 선택지를 영화는 분명하게 무시하고 있다. 그보다는 영혼 22를 이미 하나의 살아있는 인격체에 가깝게 그리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태어나지 않는다는 선택지를 거의 우울증적 자살과 등치 시키고 있는 것이다. ‘기쁨의 부재’를 부정적으로 그린다는 것은 명백히 기쁨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한정된 문제다. 그런데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나 아니면 보고 있는 사람이나 모두 태어나지 않아 본 적이 없으므로, 다시 말해 모두 태어난 사람들이므로, 태어나지 않는다=기쁨을 느끼지 못한다, 라는 선택지를 마치 ‘박탈당한 무언가’처럼 그린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조에겐 그것이 죽음으로 인해 박탈당한 것인지 몰라도 22에게는 그렇지 않다.

때문에 영화는 22에게 한번 기쁨을 ‘줬다 뺏는’ 식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5만 2천년 넘게 견지한 반출생주의가 <매트릭스>의 ‘빨간약’도 아닌 피자 한조각에 무너진다는 건 22라는 캐릭터가 결과적으로 창작자의 이데올로기(출생주의?)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는 느낌을 줘 영화 자체를 골판지처럼 얄팍하게 보이게끔 한다. (감독의 전작인 <인사이드 아웃> 역시 비슷한 면이 있다)


조와 22의 미래

조의 미래는 비교적 명확해 보인다. 조는 아마도 학교선생으로서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갈 것이다.

22의 미래는 어디로든 열린 결말이다. 우리는 다양한 상상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개중엔 꽤 행복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확률적으로 따져보았을 때, 조는 17%의 확률로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할 것이고, 75%의 확률로 안정적인 먹을거리와 집 없이 살아갈 것이며, 14%의 확률로 문맹이 될 것이고, 20%의 확률로 영양실조에 걸릴 것이며, 1%의 확률로 아사할 것이다. 평생 피자라는 것을 구경도 하지 못할 확률도 결코 낮다고는 할 수 없다.

물론 이 모든 불행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22가 결국 ‘아름다운 이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며 삶을 끝마칠 수는 있겠지만(그리고 나 또한 22가 그러기를 바라마지 않지만), 100%의 확률로 이 모든 가능성을 피해갈 수 있었다는 사실 또한 명백하다.

둘 중 어떤 선택이 더 나은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는 자신이 그 정답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이미 태어난 사람들인 관객들을 위한 주장이겠지만, 피자를 먹기 전의 22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 아닐까?


Plot twist. 천양희 시인이 말했듯이, “죽음만이 자유의지라고 말한 쇼펜하우어/정작 그는/여든이 넘도록 천수를 누렸”다고 한다. 아마 피자를 먹어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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