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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람 Mar 28. 2024

이름 없는 사람

10년 전의 일이다. 부산 중앙동. 항만 사무소 앞 왕복 4차선 도로 맞은편 도장집. 업무에 필요한 인감도장을 파야 한다는 내 고민을 들은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곳이다. 요즘 흔하디흔한 기계제작이 아닌 수작업으로 도장을 파주는 집이라고 했다. 회사에서 그다지 멀지 않고, 무엇이든 기계화 된 요즘 시대에 ‘수제’를 고집하는 특별함에 이끌려 그곳에서 인감도장을 만들기로 했다.      


첫인상은 특별했다. 1.5평 남짓의, 구둣방 같은 간이 건물. 허름해 보이는 외관 입구에 잘 오려 붙인 듯 보이는 신문 기사들이 눈길을 끌었다. 노랗게 빛이 바랜 신문 기사들은 모두 ‘20년간 한 자리에서 수제도장을 만들고 있는 장인’에 대한 내용이었다. 잘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쾌한 마음으로 노크를 하고 여닫이문을 밀었다.


나를 반갑게 맞아준 것은 신문 기사 사진 속에서 환히 웃고 있던 ‘장인’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작은 공간 한 귀퉁이의 손님용으로 마련된 자리에 나를 안내하고, 종이컵에 달달한 믹스 커피를 타 건넸다. 따뜻한 커피를 받아 들며 인감도장이 필요해서 왔다고 말했다. 아저씨는 아주 잘 왔다며 책상 앞에 앉아 두툼한 돋보기안경을 꼈다. 그 잠시의 틈에 내부를 둘러보았다.      


안은 밖에서 본 것보다 훨씬 작게 느껴졌다. 도장을 파는 데 사용하는 듯한 도구들과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도장들이 벽 여기저기에 촘촘히 걸려 더 좁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공간 어디에도 장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어 보였다. 신문 기사 속 ‘20년’이라는 세월이 그대로 묻어나는 전경은 내가 경험한 적 없는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이름이 뭐예요?”     


아저씨의 질문이 주의를 당겼다.    

  

“‘아람’이요.”     


내가 이름을 말하자 아저씨가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한자는?”

“없어요. 한글 이름이에요.”     


웃으며 있는 그대로 답했다. 순수 우리말이란 의미의 자부심도 살짝 곁들였다. 

순간 아저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한 마디를 읊조리듯 툭 내뱉었다. 나는 그 한마디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름이 없네.”     


아저씨는 들고 있던 노트에 대충 내 이름을 휘갈겨 적고 돌아앉았다. 그러고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매끈한 표면의 도장 몇 개를 뒤적여 내게 보여주었다.

원하는 디자인을 골라 아저씨에게 넘길 때까지 머릿속에 온갖 생각들이 소용돌이쳤다. 

     

이름이 없다고? 

이름을 말했는데 이름이 없다니? 

무슨 뜻이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그때까지 정겨워 보이던 내부 공간들과 처음 만났지만 친숙했던 장인이 모두 낯설어졌다. 마치 내가 와서는 안 될 곳에 와 있는 것처럼 어색하고 불편했다.     

 

내 어색함을 느낀 건지, 아니면 그저 하고 싶은 말을 내뱉는 것인지. 아저씨는 도장을 파기 시작하며 고저 없는 억양으로 줄줄 읊어냈다.     


“이름에 한자가 없으면 쓰나. 그건 이름에 의미가 없다는 거야. 사주도 없어. 그런 건 이름이라고 안 해요.”     

말문이 막혔다.     


내 이름은 아버지께서 국어사전을 뒤져가며 좋은 의미를 찾아 지어주신 것이다. 가을, 밤이나 상수리 따위가 충분히 익어 저절로 떨어질 정도가 된 상태. 또는 그런 열매를 가리키는 말로, 가을에 태어난 내가 잘 익어 풍성한 삶을 살라는 의미에서 붙여주셨다. 살면서 한 번도 불만을 가진 적이 없고, 앞으로도 자랑스러워하며 살아갈 내 이름을 ‘의미 없는 이름’이라고. 20년 동안 한 자리에서 도장을 제작한 장인이 치부해 버렸다.

      

아저씨가 입을 닫은 후로는 단 한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나는 완성된 도장을 받고 값을 치른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게를 나왔다. 경우 없는 그곳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장인’은 수제도장보다 손님의 사주풀이를 해주는 것으로 더 유명한 사람이었다. 사주풀이는 주로 이름의 한자를 가지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나는 불쾌해졌다.      


사주풀이를 하는 사람이면 남의 소중한 이름에 대해서 왈가왈부해도 되는 건가? 

내 이름에 의미가 없으면, 전 세계의 한자가 없는 모든 이름에는 의미가 없는 것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두 번 다시 찾지 않을 도장집이지만, 10년이 지난 지금은 그런 말들이 실례임을 아는 ‘장인’이 되셨기를 바라며. 오늘도 나는 내 이름에 자부심을 품는다.     


더 잘 익어 더더욱 풍성한 사람이 되기 위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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