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이미리내 장편소설

by 김다지

16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제한되었다는 자각이 평소라면 삶을 혼탁하게 했을 배경의 잡음들을 차단하고,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게끔 해준다.


27

햇빛에는 마법적인 힘이 있어서 밤에 내 발밑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절망이 햇빛 속에서는 너무 하찮게 보여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65

"말이란 건 그냥 말이 아니란다, 아가. 말은 우리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한 단순한 도구 이상이야. 말은 그 자체로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고, 말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지. 그건 절대 일방통행이 아니야."


121

위안소는 나의 청소년기를 앗아갔다. 그런 일을 겪었는데도 내가 여자 같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대신 나는 내 눈에서 늙은 남자를 보았다. 더 이상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고, 피할 수 없는 종말 말고는 인생에서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는 쭈글쭈글하게 구겨진 존재.


128

비참함에 빠져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가끔은 전혀 의외의 틈새에서 아름다움을 찾게 되었다.


129

덜컹이는 트럭을 타고 가는 그 8분 동안은 시간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고, 그 일시적인 순간이 여전히 내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나만의 중심을 유지한 채 또 한 주를 지옥에서 견뎌낼 수 있게 해주는 일주일 치의 힘이요 희망이요 아름다움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진정으로 나의 것, 그들이 더럽힐 수 없고 나에게서 빼앗아갈 수 없는 나만의 것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거기에 매달렸다.


130

그때 나는 끝의 시작을 느끼게 되었다.


131

한번은 김 박사가 눈썹을 찡그리고 철학적인 까만 눈으로, 끝은 처음에는 서서히 다가오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닥친다고 말했다.


326

"미희야, 가끔은 말이다. 가장 큰 속임수, 그리고 가장 친절한 속임수는 속아주는 거란다. 그것이 상대에게 소중한 위안이 될 수 있단다, 아가야."


328

연주의 얼굴에 떠오른 눈물 어린 미소는 연주의 이야기가 계속되는 한, 그리고 미희가 마음을 다해 들어주는 한, 연주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미희에게 말해주었다.

그들은 서로의 허구를 공유하며 친밀해졌다.


334

에메 아델은 전통적인 결혼을 필멸의 관습으로 보았다. 특별함에서 평범함으로 가는 여정. 서서히 환멸에 이르는 과정. 잔인하고 비관적이지만, 결혼에 대한 그의 운명론은 내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철학적인 답을 제공했다.


390

"여보게, 나는 감히 동정하지도, 감히 용서하지도 않는다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작가의 한국어판 서문의 글도 좋아서 같이 기록한다.


7

처음엔 '이게 될까'와 '안 될 게 뭐람'이라는 두 가지 마음이 공존했다. 하지만 일단 시작한 이상, 쓸데없는 생각은 접고 그저 나름대로 열심히 썼다.


9

아주 천천히, 조용히 발전하는 예술가도 있다는 것을 안다. 또 세상에는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해보면 의외로 되는 것이 꽤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저 우연한 기회에 생긴 변화를 따라가 열심히 잘 버텨서 이루어낸 일이었다.





2026년 첫 완독 도서다.

작년 한 해를 돌아보니 시작한 책의 수에 비해 완독한 책이 너무 적어 완독을 목표로 했고,

새해 연휴 내내 짬짬이 읽었다. 몰입감이 좋았다.

“난 일본 사람으로 태어나서 북한 사람으로 살았고 이제 남한 사람으로 죽어가고 있지.”
한 요양원에서 흙을 먹는 치매 환자 ‘묵 할머니’는 요앙사에게 자신의 부고를 써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요약하는 ‘여덟 단어’를 들려준다. 노예, 탈출 전문가, 살인자, 테러리스트, 스파이, 연인, 어머니. 요양사가 여덟 개가 아닌 일곱 개뿐이라고 묻자 묵 할머니는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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