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린 시절의 벗
책 읽기를 좋아했다, 지금도 물론 좋아하지만.
책 읽으며 느낀 바를 소소하게 글로 쓰는 것도 좋아했고,
실제로 오래 기억하고 싶은 책을 읽고 나면 싸이월드에 글로 남겨두곤 했지만,
이십 대의 감성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는
그 무수한 독후감들은 회사의 재정 사정(?)으로 다 날아가버렸다.
이제는 이 공간에 내가 읽은 책들에 대한 감상을 조금씩 남겨보려 한다.
오늘 마지막 페이지를 읽은, 신은하 작가님의 책 '나는 왜 고전이 좋았을까' 제목을 되뇌어보다가
나는 왜 책 읽기가 좋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내가 초등학교(사실은 국민학교)를 다녔을 때,
부모님은 그 시대에는 드물게 맞벌이를 하셨고
동생은 무척이나 어려 나의 대화 상대나 놀이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심심했던 나는, 자연스럽게 책과 벗이 되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빠가 일주일에 두세 권씩 사다주시는 60권짜리 만화 삼국지를 읽었던 것이(사실은 만화니까 보다,라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꾸준한 책 읽기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나 어릴 적만 해도, 적어도 내가 사는 소도시에서는 조기교육이라거나 이런 개념이 없었고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면 비로소 보습학원을 다니기 시작하는 분위기여서
그전까지는 대충 동네 친구들과 놀거나 피아노, 미술학원 등을 다니며 방과 후 시간을 보냈는데
집에 돌아오면 대개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피아노 학원을 마치고 나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책을 읽으며 보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책을 가득 실은 봉고차 같은 것이 아파트를 돌아다니며 책을 빌려주던 때도 있었는데 초등학교 4학년때인가 동네에 시립도서관이 생기면서부터 나는 말 그대로 열렬한 독서가(avid reader)가 되었다.
그때 그 도서관은 나에게는 궁전처럼 멋지고, 크고, 엄청난 놀이터라고 느껴졌었다. 수많은 책들, 그리고 새로 단장되어 깨끗하던 도서관 공원. 집에서 딱 10분 정도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세상.
어린 나이에 뭐 그렇게 수준 높은 책을 읽었겠냐마는, 그 시기는 내 인생에 다시없을 다독(多讀)의 시기였다.
대개 그러하듯,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거치면서 학업을 우선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나마 책을 읽는 부류였고, 쓰는 것도 좋아해서
꾸준히 학교 대표로 글짓기, 논술대회 등에 나가게 되었고 그런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청소년기에 읽어야 하는 필독서 따위는 대체로 다 읽었지만
고전의 울림을 느끼기에는 아무래도 나이와 경험이 미천했던 것 같다.
스무 살이 되어 서울에 갔을 때 처음으로 교보문고니 영풍문고니 하는 대형서점에 갔는데,
그곳에 가면 뭔가 나 자신이 채워지고 있다거나, 그럴듯한 사람이 되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기분이 좋았고,
대학원에 입학하자 학부생과는 차원이 다르게 다량의 책을 빌릴 수 있어서
그때 태백산맥을 완독 했던 기억이 난다(토지는 차마.. 아직 읽지 못했다).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아이를 낳고 나서부터는
책 읽는 것은 사실상 사치였고
아이가 다섯 살 정도가 되고 나서부터 조금씩 여유가 생겨
이제는 의지만 있다면, 한 달에 두세 권 정도의 책은 읽을 시간이 허여 되었다.
다시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와서,
나는 왜 책 읽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긴 했었다.
나는 아름다운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아름다운 풍경이나 사람, 예쁜 옷이나 가구, 소품 등을 탐닉하는 것과 비슷하게
아름답거나 슬프거나 마음을 울리는 문장에 대한 탐닉이
책 읽기를 좋아하게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어렴풋하게 하곤 했다.
위 신은하 작가님의 책에 언급된 조지오웰의 산문집 <나는 왜 쓰는가>에 실린 표현을 따르면,
대부분의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는 첫째는 순전한 이기심, 둘째는 미학적 열정, 셋째는 역사적 충동, 넷째는 정치적 목적이라고 하는데
나는 순전한 이기심(=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독서는 필수다,라는 내 신념에서 비롯된)과 미학적 열정(아름다운 것을 탐닉하고 나누고자 하는 마음)으로
책 읽기를 그리고 나아가 글쓰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책에는 내가 처한 평범하지만 남루한 현실도 있고,
내가 처한 것보다 훨씬 더 처절한 인생도 있으며
내가 넘볼 수 없는, 가령 넘본다 해도 얻어낼 수 없는 삶도 있다.
책에는 선생님이 일일이 가르쳐줄 수 없는, 반드시 내가 독자가 되어야 만이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고,
책 읽기의 가치는 바로 그 점에서 나온다.
나는 내가 일일이 겪을 수 없는 타인의 삶을 통해
내 삶을 더 견고하게 때로는 유연하게 만들 수 있었고,
가끔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도 책은 내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해 주었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와, 이 책 진짜 재밌는데! 내지는 와, 이 작가님 진짜 대단하신데!라고 느끼는 순간은
더없이 짜릿하고
미처 글로 표현하지 못했던 두루뭉술하다거나 정리되지 못한 나의 생각을 작가의 명료한 문장으로 마주하는 순간은 더없이 반갑다.
그래서 그 순간을 기다리면서 또 책 한 권을 읽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