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가 처음으로 피아노 콩쿠르에 나갔다. 사실 큰딸 은이의 실력은 콩쿠르에 참가하기에 어설펐다. 은이가 참가하려는 피아노 콩쿠르는 참가만 하면 무조건 상을 줄 것 같은, 일 년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열리는 대회였다. 동네 피아노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은 한 번쯤은 거쳐 가는 코스이기도 했다. 어쩌면 은이도 다른 또래 친구들이 모두 참가한다고 하니 용기를 내었을지도 모른다.
언니가 나간다 하니 선생님도 나도 둘째 영이에게도 참가하라고 권유했었다. 그러나 영이는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태어날 때부터 지독한 shy girl이다. 목을 가누고 주변을 인식하던 때부터 누가 빤히 보거나 저를 따라 하면 얼굴을 씰룩거리며 울음보를 터트리더니 이제 4학년이 된 지금도 주목받는 것과 긴장 상태에 놓이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당연히 콩쿠르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영이는 참가 불가를 외쳤다.
그렇게 혼자 참가하기로 결정한 큰 아이는 매일 조금씩 콩쿠르 곡을 연습 해왔고 이런저런 일들로 없는 시간을 쪼개가면서 집에서도 조금씩 연습했다. 그렇게 꾸준히 연습했고, 덤덤하게 대회에 나갔다. 둘째도 매일 언니의 연주를 들으면서 ‘울 언니, 최고다, 많이 좋아졌다.’ 면서 응원하고 있었다.
대회 당일, 비가 많이 왔다. 대회장으로 가는 도로는 복잡하고 어수선했고, 대회장 근처에서 꽃집 하나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지하 주차장도 없어서 멀리 떨어진 야외에 주차를 해야 하는데, 설상가상으로 우산도 챙겨 오지 못한 상태였다. 비를 맞은 채로 들어와서 등록 절차를 마치니 무료로 드레스를 빌려 준다고 했다. 마침 입고 온 옷이 꽉 끼어서 불편했던 은이는 옷이 젖었다는 핑계로 대회장 드레스를 빌려 입겠다고 했다. 빌린 드레스도 아이에게 딱 맞지 않아서 등의 지퍼를 열어 둔 채로 핀을 꽂아 고정해야 했다. 다 그런다고 하니 우리도 그런가 보다 했다.
등록 절차를 마치고 옷까지 갈아입으니 그때서야 긴장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은이는 대기실에서 자신의 순서에 맞게 다른 아이들 사이에 껴서 앉았고 남편과 영이는 관객석으로 갔다.
난 무대 뒤에 남아서 대기석에 앉아 있는 은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서를 기다리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괜히 코언저리가 시큰해졌다. 다른 아이의 연주를 들으면서 느끼고 있을 아이의 긴장감, 심장의 두근거림이 느껴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 아이가 앞으로 지금처럼 혼자 서 있을 일이 점점 더 많아질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 혹은 내가 갱년기에 들어설 나이라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코와 눈은 뻐근해졌다. 영이는 비록 한 번의 실수는 있었지만 연습 때보다 훨씬 나은 연주를 마쳤고 점수대로 주는 시상에서 2등 상에 준하는 대회장상을 받았다.
뭔가 꼬일 것 같으면서도 아슬아슬하게 마무리되던 하루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은이의 수상 소식을 전해 듣고 나서부터 삐걱대기 시작했다. 문제의 주인공은 shy girl, 영이었다. 영이는 언니를 응원하면서도 며칠 전부터 언니에게 괜히 툭툭 거리고 엄마, 아빠에게는 콩쿠르가 뭐라고 언니만 챙긴다는 둥 투덜 모드였다. 특히 그날은 아침부터 온 식구에게 짜증을 부리는 중이었다. 엄마한테 대들고, 아빠한테 툭툭 거리고 언니한테 짜증 부리고. 딱 봐도 ‘질투’다. 수상 소식을 알리는 피아노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나서부터는 노골적으로 짜증을 부렸다. 영이가 샘이 많은 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나 샘이 많았나 싶다. 언니를 시기하는 것보다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이 더 큰 아이인 줄 알았는데.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결국은 아빠와 언니한테 차례로 혼나고 나에게도 한바탕 잔소리를 듣고는 울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울다가 침대에 누운 아이 옆에 나도 같이 누웠다.
“영이, 오늘 왜 그랬어.”
“전부 나만 차별하잖아.”
“아침부터 짜증 낸 건 네가 먼저 그랬잖아.”
“그건 엄마, 아빠가 언니만 먼저 챙겨주니까 그렇지.”
소리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다. 사실 영이의 피아노 실력이 큰애 보다 낫다. 그러나 실력이 나으면 뭘 하나. 남들 앞에 나서기 싫어서 스스로 불참을 선택했으니 부럽다고 말도 못 하고, 자기보다 못한다고 생각했던 언니가 상을 받고 여기저기 축하받는 걸 보니 배는 아프고 그랬나 보다. 아이에게 그런 이야기들을 해도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냥 엄마, 아빠가 언니만 챙겨서 그랬어.”
라면서 울기만 했다. 계속 같은 얘기가 오고 가면서 나도 짜증이 슬슬 터지려고 하던 무렵 조금 진정이 된 아이가 얘기했다.
“사실 나, 질투나. 샘나......” 그러곤 한참을 다시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난 팔베개 위에 누운 영이를 꼭 껴안고 조용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한참을 울고 난 아이는 그렇게 감정을 인정하고 그 마음을 위로받고서야 울음을 그치고 편하게 잘 수 있었다.
은이도 동생이 멋진 그림을 그려서 자랑하거나 1년 전에 자신이 어려워했던 문제를 쉽게 풀어낼 때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면서 동생을 약 올리기도 한다. 그러면서 혼자 삐져서는 지금의 영이처럼 짜증으로 똘똘 뭉칠 때도 있다. 아마 자매란 게 그런 거겠지.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러면서 사랑하고 감싸주고, 엄마가 적이 되었을 때는 둘이 한 팀으로 똘똘 뭉치는 관계. 앞으로 같이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자매. 그래서 더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고 솔직해졌으면 좋겠다. 진작에 '부럽다. 나도 참가할걸'이라고 자신의 감정을 인정했으면 어쩌면 대회를 마친 이후로 하루 종일 파티 분위기였을지도 모르겠다.
울먹이는 둘째에게 잠들기 전에 이야기해주었다.
“사실 비밀인데, 엄마도 이모들한테 종종 샘나. 셋째 이모는 날씬하고 예쁘고, 둘째 이모는 엄마보다 더 착하고 더 침착하고. 현이 이모는 노래도 잘하고, 현정 이모는 그림도 잘 그려서 전시회도 하잖아. 그러니까 샘나도 축하할 땐 축하하고, 기뻐할 땐 같이 기뻐하고 나서 배 아프자. 샘난다고 미워하면 그게 나쁜 거야. 샘나는 건, 배 아픈 건, 부러운 건 당연한 거야. 그러니 샘내고 부러워해도 괜찮은데 질투하고 너무 미워하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