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당한 우리의 고통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다 포기하고 싶다… 더 이상 살아가고 싶지가 않아…‘
많이 힘들지만 그럼에도 쫓기는 시간 속에서 살아남으려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해 버텼다. 그런데 정작 돌아오는 건 더 큰 상처일 때. 나의 고군분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 될 때. 끝내 우리는 삶의 의욕을 상실해 버린다.
이윽고 우리는 살아갈 자신도 의욕도 사라진 채 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내일을 꿈꿀 용기도 없이 그저 돌아오는 매일 밤, 온몸을 표류하는 고통을 고요하게 호소하며, 동시에 나의 존재가 사라지기를 기도하면서 말이다.
또 왜인지 모르게 한번씩 길을 가다가 서러워 울기도 한다.
다만 아무도 알지 못 하게 주변 지하 주차장이나 건물 틈새로 들어가 소리 없이 그 공간을 우울로 덮는다. 집에서 조차도 소리 죽여 몰래 울어야 했던 그 시간들. 그 크기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태원 클라쓰라는 드라마 대사의 한 부분인 “얼마나라는 단어에 담을 수 없을 만큼“이라는 대사가 가장 적합한 표현인 것 같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의 힘듦의 무게는 그 누구도 측정하고 판단할 수 없다. 깊이가 얼마나 깊으며 얼마나 괴롭고 버거운지.
힘듦의 짐을 지고 걸으며 최대한 애써 버텨봤지만 결국 더 이상 살아낼 수 없을 만큼 의욕을 잃게 되었을 때, 괴로움에 마침표를 찍고 싶어질 때. 그때부터는 무엇을 봐도 죽음뿐이다. 기다려주지 않는 세상 속에서 치일대로 치여 너덜너덜해진 나는 이제 학교 옥상을 보면 투신을, 도로에 있는 차를 보면 뛰어들 생각이 든다. 나는 받아들일 수 없는, 준비되지 않은 때에 찾아온 우울함에 잠식당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모습(너덜너덜해진) 모습이어도 괜찮다.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버텨온 우리는 충분히 힘들어해도 괜찮을 사람이라는 걸. 살아낸다는 게 쉽지 않음에 불구하고 살아내고 있기에, 그리고 앞으로도 잘 살아낼 힘이 있는 사람이기에.
그러니 조금만 더 살아보자. 지금처럼 하루하루 견뎌내다 보면 언젠가 한 번은 살길 참 잘했다며 이 순간이 보람차게 될 날이 올 수 있으니. 언제가 될지 아득해서 죽기엔 우린 너무 최선을 다해온 소중한 사람들이니깐. 지친 나머지 피하고 싶고, 쉬고 싶다면 그건 약한 마음이 아니라 그만큼 최선을 다했다는 것. 그러니 약해 보일까 겁먹지 말자. 피하지 말자. 당신은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최선을 다했으니깐. 약하고 잘못된 게 아니라 그냥 당신의 모습 중 일부일 뿐이니. 무엇보다 중요항 건 괜찮아질 날이 꼭 올 테고,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그러니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이 글을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할 당신의 삶이 안온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