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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경 Jan 16. 2020

‘선수 출신’의 의미

“단장님 또 헛다리 짚으셨네. 선수 출신이 아니라 그런가?”


요즘 가장 재미있게 보고 있는 드라마 <스토브리그> 나오는 대사다. 뒷돈을 받아 해고된  스카우트 팀장 고세혁은 신임 단장 백승수를 자극하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프로 야구팀 드림즈 행정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는 어떤 직책에 누가 들어와도 매번 선수 출신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구분한다. “선수 출신 아니라더니 역시  모르네”, “선수 출신도 아닌 사람이랑 무슨 일을 어떻게 합니까?” 같은 대사가 여러  등장한다.


예전에 일하던 잡지사 편집부에서도 비슷한 일들을 겪었다. 클래식 음악을 전문으로 다루는 월간지였는데 “음악 전공자도 아니면서 기사를 제대로 쓸 수 있겠어?”, “음악 전공자도 아닌데 꽤 잘하네” 같은 말들이 사람이 나고 들 때마다 레퍼토리처럼 들려왔다. 나 역시 처음 입사하자마자 이런저런 포지션의 사람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면 “아, 음악 전공자예요? 일 잘하겠네요. 기대할게요” 같은 말을 듣곤 했다. 처음엔 좀 우쭐했고, 나중에는 늘 있는 일이니 그런가 보다 했는데, ‘선수 출신’이라는 ‘안전 영역’에 속해 있는 덕이었다. 이 영역 밖에 있던 몇몇 기자는 새로운 인터뷰이나 비슷한 업계의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전공도 안 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을 하게 됐어요?” 같은 질문에 매번 답을 해야 했고 못 미덥다는 눈빛도 종종 받아야 했다. 자격지심이 생기지 않는 게 어쩌면 더 이상한 일이다.


패션이라면 생무지지만 보그의 신광호 편집장은 SNS를 팔로우해둘 만큼 멋지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얼마 전 우연히 본인을 열등감이 높았던 사람이라 소개하는 영상을 보게 됐다. 보그’에 입사했을 당시 또래 기자들은 명문대를 나오거나 유학을 다녀왔지만 본인은 그런 게 아니라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열심히 뛰었다고 한다. 대기업에서 만드는 글로벌한 잡지에는 유명 패션학교 출신들도 많이 나고 들 것이다. 인터뷰를 보며 드는 생각은 단순히 ‘와, 멋지다, 대단하다’ 정도인데, 그 앞에 ‘선수 출신도 아닌데’ 같은 괄호는 들어가지 않는다. 업계를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인정받은 사람에게는 그런 말이 딱히 의미가 없어서다.


체육이나 예술 분야에서 ‘선수 출신’인지 아닌지는 늘 이슈다. 아마도 논리적, 혹은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영역이 존재하니 그렇다. 타고난 재능, 감각, 육체적인 조건, 그리고 고유의 성향, 표현력 등 ‘훈련’만으로는 극복하거나 뒤바꿀 수 없는 요인들이 이들 분야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러니 분석하고 평가하는 일은 그 자체로 불완전함을 지닐 수밖에 없다. 작곡가가 악보 안에 꽁꽁 숨겨둔 철학을 글로 해독하는 일, 무대 위 연주자가 홀로 견뎌내는 압박감을 완전히 헤아리는 일이 과연 가능한가? 선수가 던진 공의 각도와 속도는 숫자로 기록할 수 있지만 그가 겪어내는 내외부적 소란까지 전략의 도구로 삼을 수 있을까? 이런 ‘못 미더운’ 일들을 그럭저럭 믿게 하는 게 아마도 ‘선수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가진 힘이다. ‘그래도 겪어봤으니 어느 정도는 알겠지’ 같은 생각들. 그러니 꼬리표와 상관없이 믿을 수 있을 만큼 일을 해내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드라마 <스토브리그>의 등장인물 중 대다수는, 마운드에 서 본 적이 있다면, 프로선수들이 던지는 빠른 공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다면, 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몸으로 체득해본 일이 있다면 사무실에 앉아 행정 업무만 보더라도 경험이 없는 사람보다는 일에 대한 이해도가 훨씬 높을 거라는 생각을 공유한다. 내가 몸 담았던 편집부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음악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어떤 과정이 필요한지, 위대한 작품에는 어떤 역사적, 문화적 맥락이 녹아 있는지 깊이 있게 공부해본 경험이 있다면 음악에 대한 글을 짓고 펴내는 일을 잘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이게 다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거다! 다른 어떤 세계보다 야구가, 또 음악이 멋지고 가치 있다고 여기는 절대적 믿음 탓이다. 그러니 선수 출신이든 아니든 사실은 다 같은 마음이다.  



김호경 소속 직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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