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성에 한계를 두지 않는 유대인
‘문을 열쇠로만 여는 것이 아니다’라는 유대 격언이 있다.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하나지만,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은 하나가 아님을 시사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지혜다. 사실 세상일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모두가 부를 이룩할 수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노력은 기본 조건이다. 노력은 당연한 것이고, 남들과 대비되는 특별함이 수반될 때 취득되는 것이 부다. 남과 달리 생각해야 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로마’라는 목적지에 가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같은 길을 걸어야 할까? 절대 그렇지 않다. 인생도 이와 같아 본인이 목표한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각자에게 맞는 길을 찾아 걸으면 된다.
유대인들은 고정적인 사고에 사로잡히는 것을 끔찍이 경계한다. 제2차 디아스포라가 발발했을 서기 70년으로 돌아가 보자.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최초의 유대 교육 기관 예시바를 세워 교육의 근간을 다잡고, 유대 민족 부활의 성화를 지핀 자다. 그의 공적은 현재까지도 유대인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실제로 많은 유대인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이스라엘 티베리아스에 위치한 그의 성묘를 방문하여 토라를 암송한다. 그런 그가 공부를 하며 주의해야 할 점에 대해 이렇게 강론한 바 있다. “법칙을 모두 외워 공부해서는 안 된다. 예외 없는 법칙은 없기 때문이다.”
법은 왜 존재하는가? 문제적 상황에 논리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개인에게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 모두 동일할 수 있을까? 또 모든 경우의 수를 대비하여 무슨 일이든 논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법이 존재할까? 그렇지 않다. 경우에 따라 이미 제정된 법을 그대로 따를 수 없는 상황이 초래하는 것이 세상사다. 예외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외를 위한 또 다른 법을 제정해야 한다. 그러나 예외에는 끝이 없다. 법에는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랍비 요하난은 이것을 지적한 것이다. 법칙 또한 한계가 있으므로 법칙이 낳을 수 있는 예외와 역설적 부분에 대해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라는 랍비 요하난의 철학은 ‘하나의 정답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유대 교육의 근간이 되었다. 물론 유대인이라고 해서 법칙과 규율, 원리, 원칙을 무시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오히려 고지식하다고까지 생각이 들 정도로 율법 의식이 강한 것이 유대인들이다. 유대교의 규율과 전통을 매우 중시 여기며, 이에 맞춰 살고자 노력한다. 또 창의적 사고의 근원인 탈무드 교육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토라 전체를 암송하여 기본적인 지식을 암기하고, 체화시키는 과정을 밟는다. 법칙에 예외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려면 우선 그 법칙들이 무엇인지 꿰고 있어야 한다.
유대인들은 ‘배운 것, 이미 밝혀진 지식만이 무조건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던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긴자의 유대인 후지다 덴은 이런 유대인식 사고를 상술에 그대로 적용시켰다. 덴은 “법률이란 것은 어차피 인간이 만든 것이다. 유대인식으로 말하면 64점 정도의 점수로 합격한 것과 다를 바 없는 불완전한 법률뿐이다. 거기에 착안해야만 한다. 법률의 틈 사이에는 현금이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법률의 ‘틈’, 즉 어디까지나 법의 허점을 파고드는 것이지 위법을 행하는 게 아니다. 계약의 민족으로 불리는 만큼 법과 유대인들은 불가분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세금을 예로 들자면, 유대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탈세하는 법이 없다. 그들은 2000년간 뿌리를 잃고 타향살이를 하며 온갖 박해에 시달려왔다. 민족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국가의 눈엣가시가 되어선 안됐다. 성실히 납세하는 것은 국가의 신뢰를 얻고 인정받아 최소한의 사람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생존 방식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것이 불필요한 세금까지 납부했다는 것과 상통하는 말일까? 탈세를 하지 않았을 뿐, ‘절세’를 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유대인들은 법률을 열심히 탐구했다. 그 속에서 남들이 보지 못한 법망의 허점을 발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 결과 불필요한 과세를 막을 수 있었고, 부를 향해 더 빠르게 다가갈 수 있었다.
다른 쪽에 선 자, 히브리인(Hebrew)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유대인들은 다수의 반대편에 서서 성공의 기회를 창출한다. 본인만의 길을 개척한다. 퀴리 부인은 “강자는 기회를 만들고, 약자는 기회를 기다린다”고 했다. 새로운 분야로 진출하여 큰 성공을 이룬, 혹은 학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 사람들 중 상당수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현대식 유통업의 기반이 된 대량 판매, 염가판매는 백화점에서 처음 시작됐는데, 이는 유대인의 아이디어로부터 나온 것이다. 상업 세계에서 마저 박해받던 유대인들은 일반인처럼 전문점을 창업할 수 없었는데, 이런 부당함을 역이용하여 고안해낸 것이 백화점이다.
유대인들은 문제의 피상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다면적으로 문제를 분석하여 창의적인 해답을 내놓는다. 이것이 그들의 발상법이다. 최초의 청바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뉴턴의 운동법칙과 상대성 이론 모두 유대인들의 산물이다. 그들은 항상 새로운 답을 창조해 혁신을 도모한다. 민족 전체가 타고나기로 창의적인 덕분일까? 아니다. 창의력은 후천적으로 발전될 수 있다. 창의력이라고 함은 무엇인가? 남과 달리 생각하는 능력이다. 누군가가 규정한 하나의 답에 매이지 않고 본인만의 답을 내놓는 능력이다. 유대인들의 탈무드 교육의 핵심은 질문과 토론인데, 이를 통해 유대인들은 창의력이 발전될 수 있었다.
유대인 아이들은 정해진 시간에 부모와 거실 혹은 식탁에 모여 <탈무드>를 두고 각자의 생각에 대해 묻고 답하는 토론, 하브루타를 벌인다. 또 자녀의 성인식 전까지 아버지는 책임을 지고 아이들에게 토라와 <탈무드>를 가르치는 전통이 있다. 아이들이 중, 고등학생이 되어 사춘기가 오더라도 부모, 자식 간 하브루타의 열기는 식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부모와 거리낌 없이 질문하고 답하는 것을 평생에 걸쳐했기에 거부감이 없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어릴 적부터 토론을 습관처럼 한다. 인간의 행동은 습관에서 비롯된다. 토론을 습관처럼 하며 창의적으로 생각하길 반복하니 남과 달리 사고하고, 역발상에 능한 것은 당연한 결과 아니겠는가?
하버드, 와튼, MIT, 스탠포드와 같은 일류 대학원의 경영 석사과정(MBA)에서는 토론 형식의 교육법, 이른바 ‘케이스 스터디’가 사용된다. 케이스 스터디란 사례에 대해 연구하고, 특정한 상황이나 질문으로 경영자의 입장에서 어떤 판단을 할지에 대한 해답을 추론하는 공부법이다. 경영학은 어렵다.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비즈니스를 경영하는 입장이라면 답은 오직 하나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야만 한다. 주입식 강의는 하나의 정답만을 도출하기에 경영의 불확실성에 취약하다는 한계가 있다. 반면 케이스 스터디는 ‘정해진 답은 없다’는 전제하에 진행되기에 정답이 없는 경영학 수업에 채택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 모두가 인생을 경영하고 있는 경영자의 위치에 있지 않은가? 경영에 정해진 답이 없듯, 우리의 인생 또한 정해진 답이란 없다.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삶이 있으며, 그 안에서 각자가 생각하는 행복, 성공의 기준이란 것이 있다. 고로 누군가의 인생이 옳고, 그르다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모두가 독자적인 인생을 경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세상을 바라볼 때는 관조적으로 보아야 한다. 세상을 관조적으로 볼 때 입체적으로 사고가 가능하다. 유대인들은 세상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니 남들이 보지 못 하는 성공의 기회를 잘 포착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관조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드물다.
한국인들은 수직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수직적 사고란 기존의 상식과 규범, 논리와 경험에 의해 사고하는 것을 말한다. 수직적 사고의 장점은 이미 학습한 정보, 패턴에 의해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높은 신속성과 정확성을 보인다. 그래서 문제에 대하여 단 하나의 정답을 내려야 하는 주입식 교육에 매우 효율적이다. 문제는 혹여 학습한 정보와 패턴이 잘못된 것일지라도 이것을 재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유연하게, 창의적으로 사고하지 못한다. 이렇게 되면 이분법적으로 사고하게 되고, 고정관념, 세상의 편견에 휩쓸려 독단적으로 판단을 내리지 못 하게 된다. 남들이 옳다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때론 수직적으로 사고할 줄도 알아야 한다. 수직적으로‘만’ 사고하기를 경계해야 한다는 말이다. 필자는 학창 시절 수직적으로만 사고하여 세상을 바라보았다. 명문대를 가지 못하면 내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다. 물론 명문대에 입학하는 것은 중요하다. 열심히 공부해야 함은 학생으로서의 본분이며, 명문대에 합격했다는 것은 학생으로서 본분을 다 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직적으로 사고하게 되면 명문대에 가지 못했다는 것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본인의 노력을 폄하하게 되고, 학생의 본분을 다 하지 못한 실패자라고 생각하게 된다. 명문대에 가지 않더라도 열심히 살다보면 더 좋은 날이 있을 수 있는 것인데 말이다.
커넬 샌더스는 다양한 사업 실패를 맛보았지만, 포기하지 않은 끝에 KFC를 창업하여 성공의 반열에 들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62세였다. 레이 크록은 53세에 맥도날드를, 짐 시네갈은 47세에 코스트코를 창업했다. 모두 수평적으로 사고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수평적 사고란 기존의 상식을 뒤엎고 새롭게 창조하고, 변화시키는 사고를 말한다. 수직적 사고로는 위기가 단순히 위기로 밖에 보이지 않지만, 수평적으로 사고하면 위기가 기회로 인식된다. 성공한 사람들은 바로 위기를 기회를 보는 사람이다. 알리바바의 CEO 마윈은 말했다. “많은 이들이 불만을 갖고 있는 것에 감사하다. 사람들이 불평불만할 때야말로 당신에게는 기회다”라고.
유대인들은 인간인 만든 것이라면 무엇이든 완벽한 것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로마로 가는 길은 하나가 아니기에, 또 문을 열 수 있는 것은 열쇠만이 아니기에 이분법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살면 안 된다. 유대인들은 수평적 사고를 통해 세상을 관조할 수 있었다. 세상을 관조했기에 남들이 보지 못한 성공의 기회를 엿볼 수 있었고, 지금의 부를 쌓을 수 있었다. 세상을 관조할 수 있는 수평적 사고를 할 수 있기까지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하브루타를 했다.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는 가르침은 정말이지 수직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짙은 한국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지 않을까. 위기는 곧 기회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