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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는 되는데 우리나라는 안되는 이유, 그게 뭔데

어쩌면 비건이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해 필요한 것들.

by writer Lucy

앞서 두 편의 글(비건 메뉴에 관한 글:https://brunch.co.kr/@writerlucy/203, 채소와 비건 제품에 관한 글: https://brunch.co.kr/@writerlucy/204)에서 호주에서는 값싸고 질 좋은 야채와 과일, 다양한 종류의 비건 제품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그럼 자연스레 이런 의문이 생긴다. 왜 호주는 그게 가능할까? 일주일간 시드니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트에 쌓인 비건 상품들을 보며 어설픈 가설을 세워봤다. 그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호주는 여러 국적이 모여 살기 때문에 비건 식문화 역시 발달했다.

2. 호주는 국토 면적이 넓어서 야채나 과일 등을 재배하기가 좋다.

3. 야채 및 과일을 재배하는 생산지와 실소비 지역이 멀지 않아 유통에 드는 비용이 적다.


이 세 가지 가설이 진짜일까, 섣부른 추측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열심히 (디지털 안에서) 발품을 팔아봤다지요. 그럼 진실을 가리기 위한 여정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첫째, 호주는 여러 국적이 모여 살아 비건 식문화 역시 발달했다.

이 내용은 사실 호주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태원이나 용산처럼 외국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에 유독 비건 식당이 많다는 사실로 확인할 수 있다. 사는 사람들의 국적이 다양해질수록, 사람들의 식성이나 종교, 문화 등에 부합하는 메뉴가 늘어나는 건 자본주의 관점에서도 필요한 일이다. 특히 인도처럼 종교를 이유로 채식이 대중화된 나라일 경우 이들이 가는 곳에 비건 음식의 수요와 공급이 따라오는 일은 자연스럽다. 실제 호주에 거주하는 해외 출생자 중엔 인도 출신들이 많으며, 역시 종교적 이유로 육식을 금하는 네팔에서 온 이민자들도 많다. 시드니를 쏘다니며 금융업계의 휘황찬란한 빌딩에서도, 버스에서도, 공원이나 마트에서도 백인만큼이나 인도인이 많은 걸 보고 그 수가 많다는 걸 실감하기도 했고. 호주 통계청의 조사 결과 2023년 기준 호주 내 해외 출생자 비율은 30%라고 하는데, 이중 인도 출생자의 비율은 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반면 행정안전부 조사 결과 한국 내 외국인 수는 2023년 기준 전체 인구 대비 4.9% 수준이다. 단일민족임을 자랑스레 논하던 대한민국이니 대비되는 수치가 놀랍진 않다만 지금까지 이어온 폐쇄적인 태도가 다양한 식문화 발달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첫 번째는 합리적인 추론이었음을 확인했습니다, 땅땅.


tempImage3EHnNA.heic 이미지 출처: sbs 한국어 기사 중 호주 내 해외 출생자 비율 약 30%... “어느 나라 출생자가 가장 많을까?”


둘째, 호주는 국토 면적이 넓어서 야채나 과일 등을 재배하기가 좋다.

블루마운틴을 갔을 때 가이드를 해주시던 분이 해주셨던 말이 있다. 호주인들은 전체 영토 중 단 4%만 사용하고, 해안가를 따라 도시가 발달했기 때문에 가운데 토지는 거의 화성처럼 비어있다고. 하지만 농업 현황을 살펴보면 마냥 놀고 있는 땅은 아닌가 보다. 호주 농업자원경제국(ABARES, Australian Bureau of Agricultural and Resource Economics and Sciences)에 의하면 호주는 목재 생산을 제외한 전체 면적의 55%인 약 4억 2700만 헥타르를 농업 생산에 사용 중이다. 참고로 4억 2700만 헥타르는 우리에게 익숙한 km²로 환산해 봤을 때 4,270,000 km²이며, 대한민국의 땅 크기는 100,210 km²이다. 인구수는 2023년 기준 호주가 2,666만 명, 한국이 5,171만 명이고. 이렇게 보니 단군 할아버지.. 이거 맞아요..? 싶지만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 보자. 결국 수요는 적고 공급은 넘쳐나니 야채나 과일 등 원재료 가격이 낮아지고, 이를 활용한 비건 제품의 가격이 낮은 것도 납득할 수 있는 얘기가 된다. 농산물 생산량의 3분의 2를 수출해 세계 15대 농산물 수출국인걸 보면 말 다했지. 여담으로 엄청난 식량 생산 여력 덕분에 뉴질랜드 연구팀이 꼽은 '핵전쟁으로 종말 위기가 닥쳐도 살아남을 나라' 1위에 호주가 올랐다고. 부러움은 뒤로하고, 이 역시 사실임을 확인 땅땅.


마지막으로 야채 및 과일을 재배하는 생산지와 실소비 지역이 멀지 않아 유통에 드는 비용이 적다.

이 가설은 영토의 단 4%만 사용한다는 가이드님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본 내용인데, 아무리 한국의 경작지와 실소비구역이 멀어봤자 호주만 하겠나 싶은 마음에 접게 되었다. 다만 유통구조의 복잡함이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여전했다. 한국의 기이한 유통구조 때문에 농가는 돈을 못 벌고 소비자는 비싼 가격을 감당해야 한단 얘기는 오래도록 들어왔으니. 찾아보니 한국 농가에서 재배된 야채는 소비자에게 오기까지 생산자단체→산지유통인→도매시장 법인→중도매인→소매업체를 모두 거쳐야 한다. 모든 중간관리자들이 10원씩만 받는다 해도 50원이 이미 불어난 셈이다. 반면 호주의 유통구조엔 농가→도매상→마트→소비자만 존재한다. 중간 과정이 깔끔하니 소비자들이 받는 속도도, 마주하는 가격도 명쾌해진다. 최근에는 CSA라고, 한 지역 내에서 경작된 채소, 과일, 육류 등을 꾸러미 형태로 구독하는 공동체 지원 농업도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농가에서 직배송받는 형태는 앞서 말한 두 가지의 유통망을 없애는 대신 농작에 필요한 비용을 선지불함으로써 농가가 작물 재배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하니, 농가와 소비자 모두에게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셈이다.


세 가지 가설이 맞는지 정리하다 보니 이 모든 것들이 뒷받침되어야만 비건이라는 식생활 역시 걱정 없이 영위할 수 있구나, 비건은 혼자만의 식습관으로 고집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온전히 비건의 삶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는 개방된 자세의 국민성도, 다양한 채소와 과일을 재배할 수 있는 넓은 농경지와 복잡하지 않은 유통구조 모두 필요하다니. 솔직히 말해.. 정말 쉽지 않네요. 하지만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비건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국민들이 더 나은 식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더 다양하고 질 좋은 음식을, 저렴하게 구매하여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가 아닐까. 설사 그게 비건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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