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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지박약사 Nov 07. 2024

어제의 인간관계가 오늘의 나를 만든다.

  멀리 있는 사람은 내 삶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관계는 조금씩 영향을 주긴 하지만 큰 변화를 야기시키지 못한다. 늘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은 나의 일상과 관심사와 진로에 큰 영향을 준다. 마지막으로 선을 넘은 사람 또는 선이 없는 사람은 타인의 어떤 선택에 영향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타인의 가치관과 진로를 결정하고, 그 인생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삶이 외롭고, 답답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내가 계획하고 실행하는 일들이 모두 다 내 마음대로 된다면 굳이 타인을 찾아가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다. 타인의 이야기는 나보다 더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인 그의 의견일 뿐이므로 내가 경청하고 받아들이고 그대로 따라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원하는 이상형을 만나 연애할 수 없고, 가문과 스펙과 외모와 성격이 완벽한 배우자를 만나 결혼할 수 없고,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같은 직장에 들어갈 수 없고, 강남의 아파트를 헐값에 저금리로 살 수 없고, 말 잘 듣고 착하고 예쁘기만한 자녀를 낳을 수도 없다. 정말 우리 인생을 돌아보면 온통 문제투성이다. 내가 원하고 기도하는 것은 절반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현실에 못 미치는 고루하고 비참한 현실 때문에 미칠 것 같고, 우울하고, 때로는 죽고 싶어진다.


  이럴 때 우리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를 찾는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묻는다. 그의 인생스토리와 현재 사는 모습을 생각할 때 머릿속에서는 거울뉴런이 작동한다. 그의 말이 달콤하게 들리고,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럽고, 평소 못 생겨보이던 외모조차 멋있어보인다. 이 사람을 우리는 멘토라 부르며 존경한다. 그리고 제자가 되어 멘토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한다.


  멘토의 가르침은 선을 넘는 가르침이다. 한 사람의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인 흔적을 남긴다. 이는 마치 문신 같기도 하고, 자녀를 잉태하여 낳는 출산의 과정과 비슷하기도 하다. 나의 경우 어릴 적에는 할머니와 아빠가 멘토였고, 고등학생 무렵에는 내 친구 용이가 멘토였고, 전역 후에는 엄마의 남자친구가 멘토였고, 취업 후에는 조약사님이 멘토였고, 일산으로 이사한 뒤에는 교회 목사님이 멘토가 되었다.


  나이와 성별과 직업을 초월한 다양한 멘토들이 내가 가져야 할 꿈의 크기와 방향을 설정하고,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주었다. 할머니는 내가 그저 건강하기만을 바라셨고, 아빠는 내게 공장 기술자가 되라고 권하셨다. 친구 용이는 나중에 함께 자선사업을 하자고 꿈꾸듯이 이야기했고, 엄마의 남자친구는 내게 약사가 되면 먹고 살 걱정은 없을 거라고 알려주었다. 조약사님은 내가 목사의 길을 걸어가길 기도해주셨고, 일산의 교회 목사님은 내가 ‘축복의 통로’가 되어주길 권면하셨다.


  하나씩 살펴보니, 멘토가 제시한 목표들의 크기와 높이와 방향성이 다 제각각 다르지만, 하나같이 나를 위한 맞춤형 미래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원했던대로 내 인생은 흘러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들이 나를 보며 성취감이나 보람을 느꼈겠지만, 결국 각자의 길로 흩어지고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시작은 희망찬 꿈으로 부풀었었지만, 끝에는 왠지 찝찝하고 불만족스런 과거로 남게 되었다.


  이제는 내게 지난 날처럼 내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멘토가 남아 있지 않다. 나이가 들수록 내게 쓴 소리를 하거나, 내 삶에 참견하는 사람이 없어진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점점 고립되고, 교만해지고, 어리석어진다. 시대에 발맞춰 발전하고 성장하고 싶지만 나는 여전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거가 나를 발목 잡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내가 아직도 지나치게 과거를 의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거중독은 마치 마약중독처럼 내 삶을 뒤틀고 파괴한다. 과거의 일들이 현재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을 남긴다. 현재를 사는 우리 모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과거의 고통을 모두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고통은 사람을 강철처럼 연단시키고, 밟은 미래를 꿈꾸게 함으로써 부드럽게 만든다. 이 단단함과 부드러움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시간들, 불만족스런 현재를 견뎌내고 이겨낸 사람만이 쟁취할 수 있다. 이렇게 고통은 행복으로 이어지며 순환한다.


  나는 지금 고통에서 행복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다. 나는 내 발목에 채워진 족쇄를 끊어내고, 그 흉터의 존재를 인정하려 한다. 주님께서 탕자같은 나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신 거서럼, 나 또한 누군가를 용서하고 그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나의 힘으로는 무척 버겁다.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러나 주님이 하신다면 가능하다고 믿는다. 늘 내 곁에서 나를 가장 선한 길로 이끌어주시는 주님의 말씀과 성령 안에서 계속 걸어간다면 언젠가 참된 행복에 도달하리라 믿는다.


  주님은 이번에도 시궁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녀를 건져내실 것이다. 나는 오늘 현진자매님을 보며 이 사랑을 배웠다. 현진자매님은 배고픈 나와 아내를 위해 직접 도시락을 싸 들고 와 배고픔에서 우리를 구해주었다. 약국 테이블에 밥상이 차려지니 약국이 마치 천국처럼 환해지고 따뜻해졌다. 밥상교제를 통해 서로와 그리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덕분에 의욕이 떨어지고, 가라앉아 있었는데 기운이 났다. 다음에는 나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고 싶다는 생각의 씨앗이 내 마음에 심기는 순간이었다. 타인을 향한 진실된 마음이 타인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절망에서 구하는 행복임을 깨달았다 .이제서야 현진자매님이 왜 매일 싱글벙글인 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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