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 몇 걸음이면 그들의 집이었다. 몇 걸음이면 만났다. 겹치는 동선이 많았다. 그만큼 서로 어울릴 수 있는 시간이 넉넉했다.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부르면 바로 달려 나올 수 있는 거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멀어진다는 사실 말이다.
1년에 한 번 만나는 친구 모임이 있다. 나는 고향인 해남에, 나머지 두 친구는 각각 수원과 서울에서 산다. 마음 편하게 얼굴 한번 보고,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1박 2일 여행 모임이었다. 한번은 전주에서, 한번은 여수에서, 또 한번은 수원에서 모였다. 직장인은 월차를 쓰고, 프리랜서는 일정을 조율하고, 몇 달 전부터 숙소며, 당일의 일정을 친구들은 계획했다.
그날의 여행도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덕에 상쾌함이 더해진 날이었다. 우리는 절벽 가까이에 작은 전망대가 보이는 곳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해풍에 실린 소금기가 진하게 발밑에 철썩이고, 바위에 말아 올려진 포말의 역동이 귀를 즐겁게 했다. 자연이 연주하는 교향곡 공연에 초대된 느낌이었다.
한 사람의 생애 주기를 거쳐 가며 만난 인연일 수 없더라도, 결국 어느 시기 인연의 실을 따라 삶의 궤도를 함께한 벗이 있다면 즐겁지 못할 까닭이 없다. 각각의 생에 걷어 올린 고민이 바짓단에 달라붙어 얼룩이 졌더라도, 그날이 지나 바라보는 사진 속에 우리의 표정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저기까지 어떻게 갔더라, 머리를 굴려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되려 그 과정보다는, 아 그때 우리가 저기 있었다는 생각이 그저 재미있었다.
잘 살았으니까. 잘살고 있으니까. 각자의 터전에서, 생활인으로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또 볼 것이니까. 그때 너는 스마트폰 렌즈를 선글라스 낀 채로 응시했고, 그때 또 다른 너는 모자를 쓰고 활기차게 눈을 부릅떴고, 나는 프레임 가장 왼쪽에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각자의 성향만큼 여행을 즐기는 방식도 달랐다. 바다의 짠 내가 후각을 자극하더라도, 웃음은 사진에 실린 그날의 언어가 됐다. 때론 그 언어가 오랫동안 사용한 지우개처럼 닳아질 때도 있었다. 누가 약속하지 않아도, 그때쯤이면, 또 누군가가 말했다. 가야지? 가야제. 그 단순한 응답 속에 나는 ‘관계 인구’라는 말을 마음속에서 꺼냈다.
엄밀히 말하면 너희는 ‘출향인’이었다. 부모님이 머물러있는 고향에 운명적으로 촉각을 세울 수밖에 없는 너희의 촉각이 나는 그저 반가울 뿐이었다. 우리의 관계를 통해 삶의 질을 높이고, 따로 말하지 않아도 서로에게 삶의 기쁨을 공유하는 사이가 관계 인구이지 않을까. 단순한 휴가가 아닌, 우리 지금 잘 살고 있는 거지라고 확인하고, 확인받고, 인생이라는 여로에 동행한다는 그 자체가 귀중하다는 것을 시나브로 알게 된 나이가 됐다.
한해가 흘렀고, 또 카톡이 울렸다. 갈까? 답했다. 가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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