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지(1)

1. 일어서다

by BOATS
야, 기어서라도 너 혼자 병원가. 난 못 쉬어!

끊어졌던 기억이 퍼뜩 돌아왔다. 콜센터 사무실 한복판, 고함의 여진이 돌고 있었다. 콜센터 상담사 동료들이 천천히 헤드셋을 벗으며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40대 여성 조민희(가명) 씨는 막 매니저의 방을 나선 상태였다. 바닥에는 통화가 끊어지지 않은 휴대전화가 제멋대로 나뒹굴고 있었다. 깨진 액정에 띄워진 아이의 이름이 조각나 있었다.




밤새 10살 아이는 불덩이였다. 괴로워하는 아이를 붙잡고 조씨는 어쩔 줄 몰랐다. 출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뿐 숨을 내쉬는 아이를 나몰라라 하고 출근 준비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출근을 미룰 수도 없었다. 겨울 성수기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9시에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지난 6년간 그랬다.


해열제를 먹이고 아이를 뉘이고 분주하게 집을 나섰다. 자리에 앉고 헤드셋을 두르고 9시 정각이 되자 전화가 밀려들었다. 거센 고함소리가 쉼없이 귀를 때렸다. 평소 동료들 사이에서도 차분하기로 유명한 조씨였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말문이 쉽게 트이지 않았다. 정해진 대로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고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겨우 우겨넣어 끄집어낸 그 말이 가늘게 떨렸다. 조씨는 이 회사의 직원도 아니었다. 파견업체에서 나온 콜센터 상담사일 뿐이었다. 죄송할 이유도, 고함 소리를 들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이 생각이 났다.


끊을듯 끊어지지 않는 고함소리, 아이의 칭얼거림, 하루 한시의 삶조차 허락되지 않는 비정규직의 설움. 답도 없고 출구도 없는 것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까지 주저함이 많았다. 일어선 이후에는 돌이킬 수가 없었다. 성수기엔 그랬다. 화장실 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일과 시간에 자리를 뜬다는 것은 그 자리에 영영 돌아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씨는 마음을 굳혔다. 전화를 끊고 A4 용지를 집어 '연차신청서'라고 적었다. 사유는 일신상의 사유, 연차사용일은 2020년 1월 모일, 하루. 종이를 집어 매니저가 있는 방으로 걸어갔다. 걸음은 단단했다. 50 여 명 상담사들의 목소리가 켜켜이 쌓인 길을 한걸음 한걸음 뚫어갔다. 생경한 모습에 사무실의 시선이 쏠렸다.


매니저 앞에 종이를 내밀고 아이가 아프다고 말했다. 법에 있는 노동자의 권리를 말하겠노라 나섰지만 실제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는 앓는 소리였다. 아이의 열이 40도가 넘는다는 둥, 이번 한번만 연차를 사용하게 해주면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둥 성급한 말이 허무하게 쏟아졌다. 단단해지기에 조씨는 간절했다. 어미 노릇을 하고 싶었다. 말도 표정도 쉽게 허물어졌다.


매니저의 얼굴엔 천천히 어떤 표정이 떠올랐다. 비웃음이었다. 말이 끝나기 기다려 고개를 저었다.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은 사무적인 말투, 성수기라 어렵다고 짧게 답했다. 정적 뒤로 수많은 의미들이 스며들었다. 그 권리 어쩌고 하는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 너나 나나 선택지가 없는 벼랑 끝의 삶이라는 것, 서로가 찌르고 찔려봤자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이곳은 콜센터라는 것. 조씨에겐 그런 환청들이 들리는 듯 했다.


논리의 허점을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문이 막혔다. 사람의 권리를 이야기하려 했는데 '너는 사람이 아니다'는 식의 반박을 들은 셈이다. 도무지 힘이 나지 않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맥없이 돌아섰다. 방금 전의 단단한 결심은 오간 데 없었다.


문을 벗어나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희미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치도 못했던 고함이 나왔다. 애먼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다는 미안함, 절망감, 분노가 한순간 솟구쳤다. 마치 혼을 잃은 것처럼, 그 소리는 조씨에게 들리지 않았다.




평소 차분하기로 유명한 조씨였다. 고객에게, 매니저에게 항상 시달리면서도 싫은 내색 하는 일이 없었다. 동료들의 뒷담화가 심해지면 '그래도 이 일 덕분에 먹고 살지 않느냐'며 입바른 소리로 기세를 꺾어놓곤 했다. 동료들은 '사측 프락치가 아니냐'며 빈정대면서도 상냥한 조씨를 언니동생하며 따랐다.


깨진 휴대전화를 집어들고 조씨는 그길로 사무실을 벗어났다. 참으로 오랫만에 맞는 한낮의 햇살이 차창을 넘어 조씨의 얼굴을 연신 때렸다. 문득 생각난 목적지는 지역 고용노동청이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얘기해기 해야하는 걸까. 사람이 아닌 사람의 삶을. 부유하는 생각들을 늘어뜨린 채 차를 몰았다. 콜센터에 노조가 탄생한 날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