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이하의 것들 외 4
2024년 2월 15일 다섯 권의 책을 구입했다. 역사, 에세이, 맞춤법 관련 책, 논픽션 등 종류가 다양하다. 주제도 다양하고, 계통도 없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산 책들이 아니라는 얘기일 것이다. 알라딘 구경하다가 되는대로 책을 샀구나, 이런 식으로 책을 사서는 안 되는데...라는 생각을 하다가 방어기제가 작동한다. 이 책들을 산 데에는 뭔가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1. <판사의 언어, 판결의 속살>(손호영/동아시아/2024)
법률저널에서 연재되고 있는 <손호영 판사의 판례공부>라는 칼럼을 종종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마침 손호영 판사의 책이 나와서 반가운 마음에 구입했다. 재판을 받아야 하는 변호사의 입장에서 판사의 마음은 궁금함의 대상이다.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절실하게 알고 싶은 대상인 것이다. 나는 판사들이 쓰는 책은 거의 읽는 편인데, 판사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방식으로 공부를 하고, 어떠한 논리와 사고회로를 거쳐 판결에 이르는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이 책은 지금까지 판사들이 쓴 책과는 약간의 차별점이 있는 듯하다. 기존 책들은 대체로 자신이 다룬 사건을 각색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책은 판사가 기존 판결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판사에게도 판결은 공부의 대상이고, 해석해야 할 텍스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판결이 무엇이고, 어떻게 읽어야 할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2. <좋은 문장 표현에서 문장부호까지!>(이수연/마리북스/2024)
내용만 좋다고 해서 좋은 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좋은 내용을 담는 형식도 좋아야 좋은 글이 되는데, 여기서 형식은 고차원의 형식이 아니고 가장 저차원의 형식, 즉 맞춤법, 띄어쓰기, 올바른 문장부호 사용 등을 의미한다. 글의 최소단위라 할 문장의 '물질'을 이루는 요소들이 정확하고 탄탄해야 글이 단단하게 바로 설 것이다. 어떤 글을 쓰기 시작할 때, 이 맞춤법이 맞나, 띄어쓰기가 맞나 하는 고민으로 글을 시작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생각은 있는데, 그 생각을 표현해 낼 도구가 고장 나 있거나 녹슬어 있는 것이다. 맞춤법과 띄어쓰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글을 쓰는 일은 어려워질 거라고 생각한다. 맞춤법 관련한 책이 집에 이미 여러 권 있지만, 국립국어원 온라인 담당자로 18년 일하고 있다는 저자의 경력에 혹해 이 책을 구입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에서 자유로워질 날이 왔으면 좋겠다.
3. <보통 이하의 것들>(조르주 페렉/김호영/녹색광선/2023)
조르주 페렉의 에세이. 2023년 12월에 1쇄가 나왔는데, 2024년 1월 23일에 벌써 4쇄를 찍었다. 사람들이 책을 사지 않는다고 해도 어떤 책들은 팔린다. 광고 효과 때문인지, 책이 예뻐서인지, 작가의 이름이 뭔가 있어서 보이는 느낌을 주기 때문인지, 제목이 그럴듯해서인지(사람들은 '보통'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좋아하는 것 같다),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시대에 이런 책이, 200쪽 얇은 책의 가격이 22,000원이나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팔리고 있고, 아무튼 좋은 일이다. 페렉이 이 책에서 하고 싶은 얘기는 이 문장에 담겨 있지 않을까: 역사적인 것, 중요한 것, 시사적인 것을 파악하는 데 급급하느라 본질적인 것을 제쳐두어선 안 된다. 진정으로 참을 수 없는 것, 진정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것 말이다. 진짜 스캔들은 갱내 가스폭발이 아니라, 광산에서 행해지는 노동이다.
4. <이야기 영국사>(김현수/청아출판사/2020)
집 어딘가에 아주 예전에 산 책이 있을 터인데,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고, 특별 보급판으로 나온 책이라고 하기에 샀다. 영국이라는 나라에 관심이 많아서 이미 영국사에 관한 책이 여러 권 있지만, 영국사를 기초부터 다시 공부해 보자는 마음으로 구입했다. 다른 나라의 역사책을 살 때마다 드는 생각: 우리나라 역사라도 제대로 알고 다른 나라의 역사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를 사랑하든 아니든 간에 자기 나라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가 자랑할 일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니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공부도 해야 한다. 관심이 가지 않고, 재미가 없더라도 말이다. 이 책의 서문에 이런 문장이 있다. "민주주의의 시작이 영국이기에 민주주의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영국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있다." 난 가끔 민주주의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잡히지 않아서 아득해지는 때가 있는데, 저 말이 틀리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5. <법정에 선 뇌>(케빈 데이비스/이로운/실레북스/2018)
뇌가 손상된 사람이 저지른 살인에 대해 그 사람을 처벌할 수 있는가. 우리 법은 범죄행위 당시 책임능력 있는 사람의 행위만을 처벌한다. 책임능력이란 시비변별능력(어떠한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능력)과 의사결정능력(시비를 변별하고 이에 따라 행위할 능력)을 의미한다. 두 능력 중 하나만 없어도 책임이 없다는 이유로, 즉 그 행위를 행위자의 탓으로 귀속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처벌하지 아니한다. 범죄자들이 만취한 상태였다는 핑계를 많이 대는 이유이다. 음주로 인한 명정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해 형을 감경하거나 처벌하지 않는 것은 비판의 소지가 있지만, 뇌가 손상돼 있는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이거나 정신질환자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는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어떤 피고인에게 뇌손상이 있다는 사실(또는 조현병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확인된다고 하더라도 정말 그 행위 당시에 그 사람에게 뇌손상(또는 조현병)이 영향을 미쳤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나아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