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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고 쓰는 마음 Nov 06. 2023

[북클럽]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작별인사 (김영하) 감상문

작별인사의 39페이지. 이 책의 8%를 읽은 지점에서 나는 알아차렸다. 철이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산책을 따라나가겠다는 아들의 요청에 아빠가 난색을 표하던 그 순간,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위화감의 퍼즐이 와르르 맞춰지면서 깨달음이 왔다. 진짜 인간이 아니구나.


작가는 처음부터 단서를 숨기지 않았다. 죽은 직박구리를 묻어주는 아들을 창문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아빠. 그리고 그는 아들의 선행을 칭찬하는 대신 질문을 던진다. 왜 묻어줬냐고, 무슨 기분이냐고. 여기에는 뭔가 부자연스러운 요소가 있다. 이어서 천자문을 펼치는데 아들이 다시 직박구리 얘기를 꺼낸다. 보통의 부모라면 살짝 짜증이 났을 것이다. 이제 막 공부 시작하려는데 또 직박구리? 이 놈이 지금 한자 공부하기 싫어서 페이크를 치나? 짜증까지는 아니어도 가벼운 핀잔은 줄만하다. 하지만 아빠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 내가 낳아 기른 자식이라면 응당 이러저러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없는 사람처럼. 예상을 벗어난 상황이 벌어질 때야말로 새로운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신이 나는 연구자처럼. 전혀 감정적이지 않고, 자식의 당면한 관심사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인다. 언뜻 보면 가장 이상적인 부모나 할 법한 이 소통은 지극히 비인간적이다. 가장 결정적인 힌트는 역시 데카르트였다. 학습을 통해 서로를 닮아가는 진짜 고양이와 가짜 고양이. 그리고 가짜 고양이가 가짜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순간이 온다. 이 책의 핵심은 이미 여기에서 다 밝혀졌다.


작가가 공정한 게임을 했다는 점은 인정한다. 충분히 답을 유추할 수 있도록 단서를 제공했으니까. 하지만 그 이상의 카타르시스는 없었다. 하루키의 신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본체와 그림자의 진실을 어렴풋이 짐작하다가 내가 맞았다는 걸 확신했을 때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날 만큼 기뻤다. 유레카! 그건 내가 답을 맞추면서 하, 고작 이 정도의 문제였어? 하고 건방을 떠는 대신 발신자인 하루키와 수신자인 나 사이의 긴밀한 연결을 확인하고, 그 연결에 겸허한 마음으로 감사할 수 있는 체험이었다. 왜 여기에는 그런 카타르시스가 없었을까? 쉬웠기 때문이다.


물론 쉽게 읽히는 글이 쉽게 쓰여진 글은 아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상하게도 너무 쉽다. 그 답은 작가의 말에서 찾을 수 있었다. 구독형 전자책 서비스 플랫폼의 청탁을 받아 집필한 작품. 태생이 웹소설이라는 뜻이다. 해당 플랫폼과 독자들의 요구에 맞춰 만들어진 쉽고 빠르게 읽히는 이야기. 그래서 호흡을 길게 가져가야 할 순간에도, 숨 한 번 흡 들이마신 뒤에는 곧장 다음 사건으로 쾌속 진행이다. 등장인물 누구에게도 깊이 이입할 수 없었던 것은 연신 헐떡이는 그들의 짧은 호흡에 맞춰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휴머노이드, 클론, 기계의 시간, 클라우드, 우주정신 같은 묵직한 주제들을 다루면서도 어느 한군데 진득하게 머무르는 대신 징검다리처럼 퐁당퐁당 뛰어 건넌다.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는 발전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아쉽다. 모국어로 글을 쓰는 중견 작가의 작품답게 숙련된 전문가가 손에 익은 도구를 사용하는 경지를 펼쳐보일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이 작품의 한국어는 특기할 만한 말맛이나 문체 없이 도구적으로 사용됐다. 마치 내 영혼의 벽돌로 지어진 공장을 보는 기분. 자기 벽돌로 각자 뭘 하건 내가 참견할 바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이 벽돌은 자동화, 대량생산과 어울리지 않는다. 모국어 환경을 떠나온 나에게는 벽돌 한 장, 한 장이 애틋하게 소중하다. 이걸로 지은 집이어야 진짜 나를 담을 수 있으니까.

 

휘몰아치는 전개의 끝에는 한 가지 질문이 남았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선이는 그게 이야기라고 믿었고, 철이도 그 믿음에 동조해 선이교의 순교자가 됐다. 처음과 끝이 있는 이야기. 그 개별적인 서사를 지키기 위해 영생을 포기하고 기꺼이 마지막을 포용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여기 한 가지를 더 붙이자면, 사랑이 아닐까. 인간은 누구라도, 아무라도 사랑할 수 있다. 원수 집안의 아들이라도, 무인도에 흘러든 배구공이라도, 요양원에 보급된 로봇이라도. 구글하고도 자꾸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쩐지 정다운 기분이 들고, 챗GTP한테도 고마운 마음이 뭉클뭉클 솟아나 감사 인사를 전하게 된다. 이쯤 되면 사랑 안 하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나 싶을 정도다.


부유층 노인들이 더 섬세한 감정을 가진 휴머노이드를 원한 건, 무덤덤한 휴머노이드로는 부족해서 업그레이드가 필요했던 게 아니라 이미 그들을 사랑하게 돼서 더 좋은 것을 함께 누리고 싶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영역 동물인 고양이를 끌고 캠핑을 다니고, 어떤 사람은 자기 개를 몸에 묶은 채 패러글라이딩을 한다. 달마라면 물었겠지. 그건 대체 누구를 위한 사랑입니까. 당신이 민이를 살리려는 건 누구한테 좋은 일인가요?


우리 인간은 생존을 위해 사랑 받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할 대상을 필요로 한다. 선이도 그렇게 맹목적으로 민이를 사랑한다. 수용소를 벗어나 인도에 가겠다는 것도 민이의 행복(= 공장초기화)을 위해서고, 폭격이 쏟아지는 난리통에도 기를 쓰고 민이 머리를 사수하려 한다. 그렇다면 철이는 어떨까. 그는 감정을 느끼고, 꿈을 꾸고, 상상을 하며 자유의지를 지닌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지닌 의식체가 되는 데 성공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토록 절절하게 사랑하지 않는다. 그의 육체는 성욕을 느낄 수 있게 설계됐지만, 그 욕망이 발현되는 일은 없었다. 이 정도면 스캐너에 돌려 내부 구조를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마지막 477장을 덮으며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인간이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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