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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고 쓰는 마음 Nov 26. 2023

[북클럽] 하루키적인 모든 것  

1Q84 (무라카미 하루키) 감상문 

'하루키 문학의 결정판', '하루키적인 모든 것들의 집대성'이라는 평가에 동감하게 되는 작품이다. 


내가 생각하는 문학의 가치는 '옮겨주기'에 있다. 이는 비단 하루키 문학뿐 아니라 모든 소설에 적용된다. 자글자글하게 뿌리내린 이 현실에서 나를 가뿐히 뽑아내 다른 차원으로 옮겨주는 transfer의 감각. 그 감각은 사람이 높은 산에 오르거나 거대한 바다를 마주했을 때처럼 현실의 골칫거리를 사소한 문제로 치환하고 '별 거 아니네. 까짓 거 상대해 주지'라는 의욕을 불어넣는다. 다른 차원에서 내가 정확히 뭘 건져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건너갔다 온 느낌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나는 분명 그 세상에서 뭔가를 가져왔다. 그 뭔가를 최대한 불명확하고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하루키의 소설 작업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소설 작법을 설명할 때 '심연'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많은 작가들이 지하에서 소재를 가져다가 가공해서 내놓으려고 한다. 지하란 내 안의 어둠이다. 그건 언뜻 손쉬운 방법일 수 있지만 여러 가지로 위험하다. 헤밍웨이처럼 작가 개인의 체험에만 의존하는 리얼리즘의 함정에 빠져 전쟁터까지 갔다가 결국 더 갈 데가 없어 슬럼프에 빠지거나, 내 상처를 팔아먹고 산다는 자괴감에 먹힐 수도 있다. 게다가 비슷한 상황을 겪었어도 사람들의 상처와 깨달음은 미묘하게 다 달라서 더 넓은 독자층의 공감을 끌어내기 어려운 한계가 존재한다. 반면 하루키는 본인의 개인적인 고난과 상처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그건 뭐 내 사정이고, 작가로서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개개의 의식 아래 존재하는 심연까지 내려가서 건져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땡땡이 무엇을 의미하나요?" 같은 질문에 답을 주지 않는다. 본인의 해석이 있을 뿐 정답은 없다고 말하는 게 전부다. 그리고 독자는 '뭔지 모르겠지만 특별한 것'을 손에 쥐게 된다. 이것이 하루키가 말하는 공정 거래의 핵심이다. 당신은 내 책을 사서 읽고, 나는 당신에게 뭔가 좋은 것을 준다. 박스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고, 열어 봐도 사실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괜찮은 거래였다고 믿는 것. 실물이 아니라 그 감각을 거래하는 게 나와 독자 사이의 신뢰 관계라고 그는 주장한다.

  

한편으로는 왜 이 작품이 반페미니즘적이고 통속적이라는 비난을 받는지도 이해가 된다. 장편으로 넉넉하게 풀어낸 만큼 1Q84에는 하루키의 전형적인 3가지 여성상이 모두 등장한다. 편리한 유부녀, 신비한 소녀, 그리고 진정한 사랑. 편리한 유부녀는 어떤 책임이나 의무를 요구하지 않고, 효과적으로 남성 주인공의 성욕을 수거해 간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서 마음 편하게 즐기면 전부인 사이. 하루키 소설에는 이런 편리한 유부녀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녀들은 또 주인공에게 깨달음을 주는 구루 역할도 겸한다. '넌 아직 세상을 몰라, 애송이' 같은 느낌으로 수수께끼 같은 몇 마디를 던지거나 주인공에게 꼭 필요한 돌파구, 단서 등을 제공하는 여러 모로 편리한 존재들이다.  


신비한 소녀의 캐릭터 설명에는 외모 묘사가 압도적이다. 얼굴은 요정 같고 가슴은 풍만하며 말이 어눌해서 언어적인 소통이 어렵지만, 눈빛만으로 핵심을 전달한다. 그 핵심을 못 알아먹는 건 전적으로 주인공의 잘못이다. 그녀는 중요한 걸 다 알려줬지만 그가 미숙하기 때문에 모를 뿐이다. "뭐야? 말 좀 똑바로 해, 뭔 소리인지 모르겠잖아!"라고 따지는 건, 함축적이고 다의적인 신탁을 내리는 무녀에게 반발하는 무지렁이의 신성 모독에 불과하다.  


마지막, 진정한 사랑. 진정한 사랑은 일단 주인공과 현실적인 교류가 거의 없다. 13살에 빈 교실에서 손 한 번 잡은 것으로 그들은 진정한 사랑에 빠지고, 남은 평생 만나지 못해도 너만이 진정한 사랑이고 내가 사는 의미라며 추억한다. 찾아보려는 시도조차 안 하는 그 마음은 이해가 간다. 만나서 일상을 공유하면서 지지고 볶았으면 내 진정한 사랑이 다른 남자의 편리한 유부녀가 됐을 수도 있으니까. 이 부분을 설렁설렁 넘어가는 게 작가의 태만은 아닌가 아쉽기도 하지만, 어차피 극사실주의에 기반해 구질한 현실을 조망하는 건 하루키의 영역이 아니다. 

 

역으로 이 여성 캐릭터들을 다루는 방식이 다시 하루키적 핵심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정형화됐지만 소모적인 캐릭터로 치부할 수는 없다. 단지 주인공과 주 1회 섹스하다가 약한 고리로 찍혀 상실되는 게 야스다 교코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그녀에게 남편과 두 딸이 있다는 것, 딸 하나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한다는 것, 그녀도 학창 시절에 주도적으로 누군가를 괴롭혔고 그 사실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 재즈 음악에 대한 식견이 상당하다는 것 등을 알게 된다. 하루키가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이 비인간적이라고 비난하기에는 그 캐릭터와 관련해 치밀한 디테일이 제공된다. 우리는 그녀가 '편리한 유부녀'가 아니라 복합적이고 심층적인 한 인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정확히 어떤 사람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우리가 보는 건 빙산의 일각이며 그 뒤에 뭔가 더 거대한 실체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덴고 역시도 그녀들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가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녀들은 이런 식으로 주인공에게, 작가에게, 그리고 독자인 우리에게 한 인간으로서 존중받는다.  


하루키가 소설가 지망생인 덴고를 통해 말하는 것처럼, 그는 초현실적인 스토리를 지극히 리얼한 문체에 담아 전달함으로써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을 얻는다. 신비한 소녀가 뻔하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길랴크족 이야기를 듣고 어떤 궁금증을 가졌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도서관에 가서 어떤 조사를 했는지 등의 일상적이고 소소한 디테일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이 쌓여, 독자들에게 좀 뻔한 것도 같지만 그럴 수 있겠다는 수긍을 이끌어낸다.  


내가 이 작품을 좋아하는 건, 하루키에 나한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2가지를 충실하게 제공했기 때문이다. 옮겨주는 감각과 연결되는 감각. 심연의 차원으로 내려가면 우리는 서로 연결돼 있다. 나와 캐릭터들이, 나와 하루키가, 나와 하루키 독자들이 핏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선으로 이어져 있다. 그 연결이 고정불변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한순간에 불과하더라도 위안의 여운은 길게 이어지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거래는 성공적이었고, 나에게는 그가 들고 오는 다른 어떤 상자에도 기꺼이 고개를 끄덕일 만큼의 신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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