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읽는 시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읽고 쓰는 마음 Dec 11. 2023

[북클럽] 이야기의 힘

고래 (천명관) 감상문

고래. 부제는 ‘해방이후여성잔혹사’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해 다채로운 수난을 겪는다.


‘세상에 이런 일이’ 1년치 방송은 너끈히 채우고도 남을 정도의 수난사에도 불구하고 독서가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은 이유는, 화자/작가가 독자와 등장인물간의 거리를 꾸준히 벌리고 있기 때문이다. 고래는 구전문학적인 서술을 통해 지극히 세속적이면서도(돈과 섹스) 신화적인(귀신 출몰, 인과 없는 임신, 코끼리와 대화, 성별 전환) 이야기를 펼친다. 한 건의 구체적인 소설이라기보다는 모든 이야기의 원형처럼 느껴지는 야성이 살아있다. 그 원초적인 생명력은 끝까지 독자들을 끌고 가는 힘을 지녔지만, 개개의 등장인물에게 깊이 몰입하고 공감하는 체험을 방해한다. 화자부터가 걸핏하면 ‘그것은 땡땡의 법칙이었다’라는 표현으로 거리감을 확보하고 삶의 상투성을 강조하는 식이다. 마치 ‘다 이래, 사는 거 누구나 죽을맛이야. 너보다 더한 인생 쌔빌렸어. 그러니까 너만 힘들다고 오바하지 마’라고 일침을 놓는 듯이. 앞서 베어타운을 읽을 때는 마야가 성폭행 이후 겪는 괴로움, 특히 첫째를 잃은 트라우마 위에 또 한 번 내 자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덮쳐 처절하게 고통받는 부모들을 보면서 소화불량이 올 정도로 몰입했는데 고래에서는 얄짤없다. 만약 순서를 바꿔 읽었더라면, 이 지경으로 당하고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정도 당하고 이 난리를 피우나 싶었을지도 모른다.


고래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은 나름의 서사가 있고 입체적인 반면 남자들은 정욕 아니면 식욕에 매몰된 채로 뇌가 다리 사이에 달린 것처럼 단순화된다. 여기서 성욕 없는 남자라고는 애꾸의 벌치기 정도. 그 덕분인지 애꾸는 막바지에 인간을 초월한 산신령 같은 존재가 된다. 춘희도 마찬가지다. 그리운 상대가 생기고 자식까지 낳지만 끝까지 성애에 눈을 뜨지는 못했고, 애꾸와 춘희는 자연인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물론 그들조차도 남자의 욕망에 희생되는 아픔에서(애꾸 - 곰보, 춘희 - 트럭남)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남자들은 서로 대화를 하지 않지만, 여자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공유함으로써 유대를 강화한다. 금복과의 대치에서 애꾸는 자신의 동반자이자 강력한 무기인 벌들이 산채로 화장되는 꼴을 목도했다. 하지만 너 죽고 나 죽자고 달려드는 대신 금복에게 자기 사연을 들려준다. 금복 역시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고, 타협안을 제시한다. 이 책에서 남자는 설령 이야기를 하더라도 꼭 여자에게 한다. 칼자국이 금복한테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그래서 책 말미에 붙은 ‘고래가 남근 선망’이라는 시대착오적 평론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남자들은(금복아빠, 생선장수, 칼자국 등) 성과 금전, 권력, 생활의 방편 등을 쥐고 여자를 핍박하지만, 정작 여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이야기/욕망을 해소할 수 없기에 불완전하다. 칼자국은 이 작품에서 가장 세부적인 서사를 지닌 남성 인물이지만 이름도 없을 뿐 아니라 그를 묘사할 때마다 따라붙는 수식어("희대의 사기꾼이자 악명 높은 밀수꾼에 그 도시에서 상대가 없는 칼잡이인 동시에 호가 난 난봉꾼이며 모든 부둣가 청녀들의 기둥서방에 염량 빠른 거간꾼")로 인해 실재하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유형으로 전락하고 만다. 유일하게 이야기를 하는 남자가 약장수지만,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이야기는 소통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 추구를 위한 수단이다. 이는 약장수의 신분세탁 이후 지식인들과의 대화법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나 이야기의 주도권을 쥔 여자들은 그 자체로 생생하게 살아있고, 그 생명력을 바탕으로 진화해 원하는 바를 쟁취한다. 같은 맥락에서, 주인공에 가까운 여성 인물인 춘희가 이야기의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은 그녀의 삶에 끊이지 않는 비극을 초래한다.


선명한 대조와 비교를 골자로 하는 구조 역시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수단이다. 돈과 성공, 여자로서의 인생과 남자로서의 인생, 여러 남자와 미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다 가진 금복과 아무것도 못 가진 춘희는 대조를 이룬다. 춘희와 노파는 아무것도 못 갖고 내내 당하며 산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하지만 그들이 걷는 길은 전혀 다르다. 노파는 악귀가 됐고, 춘희는 붉은 벽돌의 여왕이 됐다. 춘희가 평생을 바쳐 찍어낸 벽돌은 실용성을 떠나 스스로의 이상에 충실했던 건축가에게 구원을 제공했다. 춘희의 마지막은 점보를 만나 안드로메다에 안착하는 것으로 평화롭게 막을 내린다. 이 결말은 금복의 거짓말 같은 성공보다 더 안락한 구원의 감각을 제공한다.


세상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타라 아빠의 광신도 서사(in Educated) 혹은 베어타운의 성폭행범 옹호론 같은 나쁜 이야기는 사람을 망가뜨리지만, 좋은 이야기는 구원한다. 비슷한 재료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구원이 너무 거창하다면, 최소한 위안이라도 되는 좋은 이야기를 찾고 나누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그런 좋은 이야기를 찾기 위해서 함께 읽고 나누는 이 행위야말로 나를 위하고, 나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를 위한 길이라는 확신이 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북클럽]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