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읽는 시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읽고 쓰는 마음 Feb 18. 2024

[북클럽] 기만의 구원자

종이여자 (기욤 뮈소) 감상문 

미용실에서나 한 번씩 들여다보는 패션잡지 같은 책이다. 고급스러운 코팅지 위에 화려하고 덧없고 욕망을 부채질하는 사진들이 꽉꽉 들어찼지만, 유의미한 콘텐츠는 가뭄에 콩 나듯이 부족한. 말리부 해변의 대저택에서 출발해 할리우드 유명 인사들의 이름이 대거 등장한 다음 제로백 2.5초의 위용을 자랑하는 부가티 베이론에 몸을 싣고 멕시코 고급 리조트까지. 부러워서 한숨을 쉬기에는 너무 질리는 맛. 한때 자동차 출입 기자로 고급차들의 '그사세'에 머리만 살짝 들이밀어 본 입장에서 한 마디 얹는다면, 밀로 롬바르도의 허세 넘치고 날티 충만한 속물 이미지에는 페라리가 좀 더 어울린다. 마침 밀로도 이탈리아계로 추정되고. 


처음부터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시각화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 장소뿐 아니라 소품 하나하나까지 꼼꼼하게 묘사해, 이대로 가져다 써도 대본의 80%는 바로 완성될 것 같다. 여기 언급된 할리우드 인사들 중 하나가 카메오로 출연해 주면 더 좋았을 테고. 비록 그들에게 '의외의 변태적 기질'이라는 썩 달갑지 않을 낙인을 찍긴 했지만. 시각화 과정에서 주구장장 자본의 향기를 폴폴 풍기는 건 뭐.. 전략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겠지. 반대로 LA 빈민가의 처참한 생활상이나 캐롤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를 그 정도로 자세히 설명하면 판매고가 곤두박질쳤을 테니까. 


톰의 인물정보 파일에서는 약간의 반성도 했다. 따로 뭘 비축하기는커녕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날품팔이처럼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소설에 투입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캐릭터의 현실성과 독자들의 공감대는 수면 아래 자리 잡은 큼직한 빙산의 몸통에서 나온다는 대목은 상당히 따끔했다. 


절반 정도까지는 꾸역꾸역 읽다가, 톰의 책과 캐롤 사이의 연관성이 나온 다음에야 이제 시작인가 싶었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이야기의 본질이니까. 톰의 이야기는 캐롤을 구원했고, 밀로의 이야기는 톰을 구원했다. 하지만 캐롤은 톰의 이야기가 허구라는 것을 알았던 반면 톰은 속아 넘어갔다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기만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구원자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당장은 빌리가 그리운 마음에 릴리를 만나겠지만, 톰이 사랑에 빠진 여자는 빌리인데 두 여자 사이의 간극을 극복하는 게 가능하려나? 게다가 눈 뜨고 기만당한 톰과 캐롤은 앞으로 밀로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저금 깨고 생고생 한 캐롤. 자자, 널 위한 서프라이즈를 준비했어, 라며 설레발을 치는 밀로의 성화에 안대를 하고 따라가다가, 별안간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서 떠밀리는 듯한 충격을 받은 톰. 내 재산을 날린 것까지는 용서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를 위한답시고 이렇게까지 내 인생을 멋대로 뒤흔들었다면.. 쓰라린 빈민가 시절을 안 거쳐서 인생에 대한 통찰력과 포용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용서가 죽기보다 어려울 것 같다. 한 번 깨진 신뢰는 회복되지 않는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번역이다. 번역이 2차 창작이라는 말이 좀 과한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매끄러운 번역은 충분히 '창작'이라는 명찰을 달 자격이 있다는 걸 알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북클럽] 이야기의 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