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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고 쓰는 마음 Apr 06. 2024

[북클럽] 구원은 두 번째 통조림에서 온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앤서니 도어) 감상문

'읽는시간호'의 항해에서 오랜만에 건진 보석. 10년에 걸친 방대한 자료 조사와 인고의 집필을 갈아 넣은 대작. 혼자 읽기는 버거웠겠지만, 북클럽 선정 도서가 된 덕분에 끝까지 읽을 수 있었고, 이 책을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이야기의 테마는 빛. 빛은 생명과 생명을 연결한다. 수만 년 전, 태양에게 한껏 사랑받아 빛을 듬뿍 머금은 생명체는 열과 압력, 영원처럼 긴 시간을 거쳐 석탄이 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제 안에 품었던 빛을 내어주면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덥힌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빛과 사랑은 그 거짓말 같은 세월을 뚫고 이어진다.


이 책의 주인공들도 그렇다. 마리로르는 눈이 멀면서 빛이 사라진, 소리와 촉감으로 이루어진 자신만의 세계에 떨어진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랑과 노력, 훈련을 통해 실재하는 바깥세상과 연결된다. 광산 마을 고아원에 갇힌 베르너 역시 라디오를 매개로 바깥세상과 연결되기 위해 분투한다. 그리고 실제로 빛과 같은 목소리가 그와 유타에게 닿는다. 마리의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가 합심해서 만든 어린이 프로그램이다. 그 빛이 베르너의 마음을 밝혔고, 어둠 속에서 그를 이끌어 마리를 만나게 했다. 아무도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했던 오래 묵은 빛이 결국 환하게 타오르며 마리의 목숨을 구하고, 베르너를 자기 자신으로 되돌린다.


그들의 꿈에 비해 현재의 세계는 너무도 좁아서, 마리와 베르너는 각자 더 넓은 세상을 꿈꾼다. 마리는 점자책과 해양생물들 속에서. 베르너는 과학과 수학, 그리고 인생의 동아줄 같은 라디오의 전파 속에서. 하지만 그들은 갇히고 만다. 마리는 에티엔의 집, 이어서 다락방에. 베르너는 군사학교를 거쳐 전쟁터에. 그런 그들이 만나는 순간, 세계는 넓지도 좁지도 않은 전부가 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전부. 그밖에는 다른 누구도,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전부. 두 사람이 복숭아 통조림을 여는 대목은 책 안팎에 있는 모두에게 구원을 선사한다. 천국에서 풍기는 듯 황홀한 향기와 절망적으로 어두컴컴한 세상에 다시 불이 탁 켜지는 맛. 작가도, 독자도, 주인공들도 한마음이 된다. 우리는 이 순간을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다는 것을 실감하며. 그 통조림 역시도 마네크 아주머니가 남겨둔 빛이고 사랑이었다. 나치 악당 룸펠에게 내려진 벌은 죽음이 아니다. 구원은 불꽃의 바다가 아니라 복숭아 통조림에 있다는 진실을 끝내 모른 채로 죽어버린 것이 그의 지옥이다.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되기 위해 신호를 보낸다. 그것이 나를 채우는 빛, 읽고 쓰는 마음. 희망 없이도 끊기지 않는 부단한 신호와 섬광처럼 번득이는 한 순간의 연결. 결국은 그게 인생이고 의미고 전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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