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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고 쓰는 마음 May 06. 2024

[북클럽] 믿어주는 사람에게는

집단착각 (토드 로즈) 감상문 

밥 델라니의 사례가 기억에 남는다. 무간도, 신세계, 마이 네임을 통해 이어지는 유구한 이중스파이 서사. 이중스파이가 이렇게 인기를 끄는 고전이 된 이유는 주인공이 시련을 두 배로 겪기 때문이 아닐까? 밖에서는 원래 소속된 조직과 잠입한 조직 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하는 시련이, 안에서는 정체성 위기가 폭풍처럼 불어닥친다. 


나는 선량하며 정의를 추구하는 경찰이다. 하지만 범죄자처럼 말하고, 범죄자처럼 행동하며, 범죄자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고, 내 주변의 지인과 친구들은 모두 범죄자다. 이런 식으로 3년이 지났다. 대체 지금의 나는 경찰인가, 범죄자인가. 1959년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 실태를 고발하기 위해 흑인으로 변장한 채 남부로 뛰어든 '블랙라이크미'의 작가 존 하워드 그리핀이 떠오르기도 했다. 새로운 일상의 사회적 압박이 얼마나 거셌던지, 그는 매일 밤 자신으로 돌아가 아내와 통화를 할 때도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없었다. 블랙으로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부의 블랙 정체성이 커지면서 '내가 감히 백인 여자와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고, 내 아내라고 불러도 괜찮은 걸까'라는 자기 검열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정체성이란 개인의 독자적이며 고유한 영역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내 착각은 아니었을까. 이토록 무거운 사회적 압박 아래 온전한 정체성을 지킨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깨달았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나만 봐도 그렇다. 매년 휴가를 받아 한국에 갈 때마다 한국인들의 종족 특성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한국을 떠나 돌아갈 집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나. 하지만 사실 내 안에는 엘리트주의, 생산성 강박, 효율 만능주의, 인간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대하는 '인적자원론' 등의 한국적 가치관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외계인이 침공하면 '한국인 표본'으로 잡혀갈 만큼이나 뼛속 깊이 한국적이며 그 잣대로 남들을 평가하고 경멸한다. 이 정도로 한 몸이면 이건 더 이상 한국 사회가 내게 드리운 그림자가 아니라 진짜 내가 된 게 아닐까. 


집단착각에 대응하는 나의 무기는 주로 침묵과 멸시, 뒷담화였다. 뭔가 부당한 일이 일어나면 '또 시작이네, 한심한 것들, 항상 이런 식이지'라고 경멸함으로써 그들과 나를 차별화하려 했다. 앞에서는 뚱하게 입을 닫고 있다가 뒤에서 사람들과 모여 욕을 했다. 이 책을 읽으니 그게 나를 지키거나 집단착각을 깨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겠다. 제 생각에 그건 이러저러한 점에서 잘못된 것 같아요, 라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 증오나 경멸을 베이스로 깔지 않고 있는 그대로. 감정을 섞지 않고 반대 의견을 말한다는 게 아직도 어렵다. 그걸 말하려고 준비하는 순간, 나는 익히 학습된 미래의 전투 현장으로 순간 이동하고 만다. 내가 이런 의견을 내면 이렇게 공격받겠지. 물론 거기에는 팩트뿐 아니라 인신공격도 포함되겠지. 그게 가장 효과적으로 치명타를 입히는 수단이니까.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야. 어디 한 번 때려 봐라. 백배 천배로 갚아줄 테니. 이미 전투력이 충만한 상태로 곱게 말하기가 어렵고, 듣는 쪽에서도 그렇게 바짝 날을 세운 상대의 말을 곱게 듣기가 어렵다. 너도 나만큼이나 모두의 이익을 바라고, 내가 어떤 말을 하건 인간 대 인간으로 존중할 것이라는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진작부터 답은 알고 있었다. 

거짓말도 믿어주는 사람에게는 진실이 된다. 
어떤 짐승이라고 해도 저를 인간으로, 그것도 좋은 사람으로 보는 사람 앞에서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거야. 


내가 썼던 대사들이다. 나는 이미 모두를 귀하게 대접하고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주인공을 구현한 경험이 있다. "세상 속에 자신의 취약한 면을 드러내고 넓히는 과격한 행동을 통해" 우리는 사회적 신뢰를 증폭할 수 있다. 이게 결국 나에게도 이롭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믿어주면 나한테는 좋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커지니까. 아는 대로 실행한다. 간단한데 어렵다. 하지만 그 어려운 길을 가면 조화로운 삶을 살게 된다.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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