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회화는 어떻게 사건을 포착했는가?

<위험한 그림들: 세계사를 바꾼 결정적 순간>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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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율의 <위험한 그림들: 세계사를 바꾼 결정적 순간>은 그 평온한 액자의 유리를 깨부수고,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복판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 알타미라의 어두운 동굴 벽화에서 시작해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캔버스를 단순한 감상의 대상이 아닌 '사건의 목격자'이자 '시대의 비명'으로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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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처형

이 책이 포착하는 가장 서늘한 지점은 역사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지날 때의 찰나다. 폴 들라로슈의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처형>을 마주할 때, 우리는 단순히 한 여인의 비극을 보는 것이 아니다. 튜더 왕조의 비정한 권력 투쟁과 종교적 광풍이 빚어낸 '9일 천하'의 종말, 그 단두대 앞에서의 정적을 목격한다. 눈이 가려진 채 더듬거리며 목판을 찾는 가녀린 손끝은, 거대한 역사적 조류 앞에서 개인이 얼마나 무력하게 파멸할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저자는 이 기록을 통해 권력이 속삭이는 우아함 뒤에 숨겨진 잔혹한 속성을 해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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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4세와 그의 아들

그림은 때로 한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은 심리적 붕괴를 증언한다.


일리야 레핀의 <이반 4세와 그의 아들>은 러시아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치명적인 '실수'의 현장을 처참하게 묘사한다. 광기에 눈이 멀어 자신의 후계자를 내리친 황제의 공포 어린 눈동자와 죽어가는 아들의 관자놀이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


저자는 이 선혈 낭자한 캔버스가 단순한 부자간의 비극을 넘어, 류리크 왕조의 종말과 러시아의 '동란 시대'를 예고하는 역사적 복선이었음을 짚어낸다. 캔버스 위에 고인 피는 마르지 않은 채, 독자에게 묻는다. 인간의 광기가 빚어낸 역사의 얼룩을 일개 한 사람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가. 권력의 암투와 생존을 위한 과민한 예민함은 이내 왕가를 떠나, 한 가정에 파탄을 이르게 한다. 참으로 씁쓸한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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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승리

역사적 인물들의 비극을 넘어, 저자가 제시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기록은 펠릭스 누스바움의 <죽음의 승리>다. 홀로코스트라는 거대한 광기 속에서, 화가는 자신의 캔버스를 최후의 증언대이자 탈출구로 삼았다.


유대인 화가로서 죽음을 예감했던 누스바움은 그 참혹한 혼돈과 죽음의 행진을 화폭에 박제했다. 이는 더 이상 예술이 아니라, 사라져 가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가장 절규 어린 '고발'이다. 인류는 또 한번 과오를 저질렀고, 또 다른 고통을 낳았다. 이는 현대에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똑같은 과정을 반복하면서 훗날 이 시간이 어떻게 기록될 지는 후대에게 맡길 뿐이다.



알타미라에서 아우슈비츠까지,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은 '기록의 숭고함'이다.

저자는 집요한 시선으로 그림 속에 숨겨진 시대의 과오와 공포를 끄집어낸다. 우리가 이 불편하고 위험한 그림들을 보아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캔버스 위에 새겨진 비극적인 역사의 한 장면을 응시하는 행위만이, 오늘날 반복되는 것을 막는 유일한 방파제가 되기 때문이다.


<위험한 그림들>은 미술사를 지루한 연대표에서 해방시켜 생생한 현장의 드라마로 되살려 놓았다. 캔버스 위로 흘러넘치는 역사의 뜨거운 피와 차가운 눈물을 목격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예술이 지닌 가장 위험하고도 정직한 생명력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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