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예술이 차고 넘치는 시대에 일상을 어떻게 채워볼까? 다양성은 선택의 기쁨을 줄 수도 있지만 선택에 어려움을 느끼는 이들에게는 더 없이 괴로운 일이 될 수도 있다. 노란가방이 제안하는 아트&컬처 버킷리스트 중 관심가는 아이템이 있다면 ‘나의 버킷리스트’에 추가하여 하나씩 즐기시기를!
연출가 이보 반 호브(Ivo van Hove) 그리고 러닝타임 5시간 45분. 두 가지 요소만으로도 연극 ‘로마 비극’에 대한 기대감은 최고점에 이를 만했다. 그렇다면, 이보 반 호브는 누구인가. 그는 인터내셔널 시어터 암스테르담(ITA) 예술감독으로 유럽 연극계에서 가장 중요한 연출가 중 하나로 손꼽힌다. 2007년 ‘로마 비극’을 발표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희곡뿐 아니라 영화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들을 무대화하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왔다. 2014년 발표한 아서 밀러 원작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으로 2015년 올리비에상 최고연출상, 작품상을 수상하고 이듬해 브로드웨이 진출을 통해 토니상 최고연출상과 작품상을 석권하며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어 쥘리에트 비노슈의 ‘안티고네’, 주드 로의 ‘강박관념’ 등을 연출하며 스타 배우들을 연극 무대로 이끌었으며 2017년 11월에는 영국 내셔널 시어터에서 발표한 ‘네트워크’로 다시 한번 전석 매진과 호평을 받고 브로드웨이 무대에 진출하며 관객들의 찬사를 얻어냈다. 그리고 현재는 12월 개막을 예정으로 브로드웨이에서 새로운 버전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연출을 맡아 준비 중이다.
이처럼 화려한 이력을 지닌 실력파 연출가의 진면목을 알게 된 것은 2년 전, 두 번째 내한 공연 작품인 ‘파운틴헤드’를 통해서였다(첫 번째 내한 공연은 2012년 ‘오프닝 나이트’). 강렬하고 인상적인 연출 방식에 매료되어 올해 초 ‘로마 비극’ 내한 일정을 확인한 후 11월 8일부터 단 3일간 열리는 공연을 기다렸음은 물론이다. 이보 반 호브가 캐릭터를 해석하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관점 못지않게 흥미로운 것은 이야기를 보여주는 방식. 때문에 이번 무대는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에 대한 기대감이 앞섰다.
휴식 시간 없이 러닝타임 5시간 45분
6시간에 달하는 공연 시간 동안 휴식 시간은 없으며, 관람석은 지정석이 아닌 자유석이다. 관객들은 무대와 객석을 오가며 원하는 곳에서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 공연하는 동안 공연장을 임의로 드나들 수 있으며, 출출하면 무대 양쪽 끝에 마련된 바에서 간단한 스낵과 음료를 즐기며 관람할 수 있다. 공연 분위기를 해치는 최대의 적인 휴대폰은? 물론, 꺼 둘 필요 없다. 공연 중 폰 카메라로 무대와 연기하는 배우들을 촬영하는 것이 가능하며 실시간으로 SNS에 올려도 무방하다.
장시간의 러닝타임에 각오를 단단히 하는 한편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관람에 제약이 없다 보니 약간 우려가 되는 것도 사실. 막이 오르고 극이 진행됨에 따라 무대와 객석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극 중 총 8번의 장면 전환이 있는데, 처음과 마지막을 제외하고 관객은 배우들의 고유 영역인 무대에 올라 가까이에서 그들의 연기를 볼 수도 있고, 객석에서 관객들이 혼재된 가운데 연기하는 배우를 볼 수도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처음에는 다소 혼란스럽다. 그렇지만 차츰 다른 공연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색다른 묘미를 찾아 즐기게 된다. 마찬가지로 관객들의 움직임이 몰입을 방해하는 듯싶지만 마치 백색 소음처럼 오히려 극에 더욱 집중하게 만들기도 한다.
객석과 무대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관람하다 보면 자칫 장면을 놓치거나 네덜란드어로 공연하는 극의 자막을 놓쳐 일부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또한, 별도의 휴식 시간이 없기에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벌어진 장면과 내용을 놓칠 수도 있다. 이는 연출가가 의도한 장치로 “관객들은 역사를 바꿀 결정적인 독백이나 정치 살인의 현장을 놓치게 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일은 우리 삶에서도 실제로 일어나기 마련”이라는 것.
고대 서사 ‘로마 비극’에 투영된 현대 정치
이보 반 호브의 대표작 ‘로마 비극’은 셰익스피어가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쓴 ‘코리올라누스’, ‘줄리어스 시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등 3개의 희곡을 엮어 현대의 정치, 사회 드라마로 만든 작품이다.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며 로마를 구해 영웅으로 추대 받지만 오만불손하여 평민들에게 거친 말과 경멸적인 태도를 숨김없이 드러내 결국 로마에서 추방당하는 ‘코리올라누스’,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지만 권력이 집중되자 독재자가 될 것을 두려워한 이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줄리어스 시저’. 그리고, 시저의 사망 후 로마를 지배한 통치자 중 한 명인 안토니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사랑과 그로 인해 결국 권력을 잃고 죽음을 맞는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들이 로마 전통 의상이 아닌 정장을 차려 입고 대사를 해도 낯설지 않다. 정치와 그에 따른 메커니즘은 시대를 불문하고 유사하기 때문일까. 게다가 역사 속 남성이었던 인물, 예컨대 옥타비우스와 로마의 집정관을 여성 배역으로 설정하니 현대의 현실 정치처럼 감정이 쉽게 이입되기도 한다.
연극이지만 무대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무대 위에 설치한 화면을 통해 보여준다거나 영화적 기법을 도입해 인물의 심리 상태를 보여주는 것은 미디어 기술을 적절히 활용하는 이보 반 호브의 연출 방식 중 하나이다. ‘로마 비극’에서도 그의 이러한 연출은 흥미를 더했다. 특히, 안토니의 충성스러운 부하 에노바르부스가 안토니의 패배에 절규하며 공연장 밖으로 뛰쳐나갈 때에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웃음을 터트리게 되고 만다. 배우가 공연장 밖으로 뛰쳐나간 탓에 무대는 텅 비어있고 때마침 공연장 앞을 지나던 행인들은 절규하며 좌절하는 에노바르부스 역을 맡은 배우를 보며 의문의 눈길을 보낼 수밖에. 관객은 그를 따라가 촬영한 카메라맨 덕분에 무대 위 스크린을 통해 바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누가 옳은지 어느 방향을 따라야 하는지에 대해 판단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는 정치적인 이상이나 행동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거나 실패하는지 보여줄 뿐이다. 이보 반 호브 역시 마찬가지이다. 예상치 못한 파격적인 연출 방식을 택했지만 의견을 피력하진 않는다. 오히려 관객들이 각기 다른 관점에서 자유롭게 감상하면서 각자의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기를 바란 듯하다. 커튼콜 이후 스크린 위로 흐르는 여러 가지 질문들. ‘자유는 존재하는가?’, ‘정치는 개인의 견해를 바꿀 수 있는가?’, ‘대중은 사리를 잘 분별하는가?’, ‘권력욕이 없는 정치란 가능한가?’…. 이에 대한 답은 스스로 구해야 할 것이다.
데일리타임즈W 에디터 정지현 dtnews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