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편화된 서사의 연극

켄터키 루트 제로 리뷰

by Wunder
게임명: 켄터키 루트 제로
제작사: 카드보드 컴퓨터
출시일: 2020.01.28

'켄터키 루트 제로'는 게임이라는 형식 위에 문학, 연극, 설치미술, 사회비판을 층층이 쌓아 올린 실험적 서사체다. 이 게임을 단순히 ‘어드벤처 게임’이나 ‘포인트 앤 클릭 게임’으로 규정하는 것은 어렵다. 플레이어는 의도를 명확히 알 수 없는 등장인물들과 대화하며, 현실인지 꿈인지 모호한 공간들을 떠돌며, 목적지에 도달한 것 같으면서도 끊임없이 표류한다. 이는 분명히 미국의 어딘가를 배경으로 하지만, 동시에 시간과 공간의 균열 속에 존재한다. '켄터키 루트 제로'는 바로 그 균열된 세계를 탐험하게 하는 게임이다.


게임의 중심축은 가상의 고속도로 ‘루트 제로’를 따라가는 여정이다. 플레이어는 트럭 운전사 ‘콘웨이’를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들과 엮이며 파괴된 산업 구조, 낙오된 노동자들, 망각된 공동체의 이야기들을 수집하게 된다. 그러나 이 여정은 명확한 목표지점을 향해 직진하지 않는다. 도달할 수 없는 도로,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장소, 액트 사이의 다큐멘터리적인 인터미션은 이야기 자체를 파편화하고 구성마저도 불확실하게 만든다. 이 게임의 여정은 목적이 아니라 표류다.


내러티브 방식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켄터키 루트 제로는 대사 선택지를 통해 정답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가 이 인물의 정체성과 기억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를 묻는다. 플레이어의 선택은 인물의 과거를 결정하거나 현재의 감정을 확정 짓는다. 이로 인해 이야기는 고정된 흐름이 아니라 서서히 채워지는 기억의 연극이 된다. 플레이어는 마치 등장인물의 ‘배우’처럼 행동하며 장면을 연기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는 위치에 놓인다.


시각적 연출 역시 인상 깊다. 미니멀한 3D 배경, 연극적 조명, 인상주의적 색채 사용은 현실 세계를 비추기보다 ‘기억과 상징의 이미지’에 가깝다. 특히 건물 내부가 전면을 잘라낸 무대처럼 연출되거나, 움직이는 조명과 실루엣으로 공간이 전환되는 장면은 연극적 장치가 디지털 공간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 지를 보여준다.


결국 이 작품은 전통적인 의미의 게임이 아니다. 플레이어는 이 작품을 클리어하는 것이 아니라 겪어낸다. 《켄터키 루트 제로》는 게임의 인터랙티브한 특성을 이용해 문학과 연극, 다큐멘터리적 감각을 새롭게 조합한 하나의 예술적 시도이며, 디지털 시대의 감각으로 재해석한 현대 연극이다. 이것은 망각된 자들의 고속도로 위에 세워진, 아주 조용하고 아름다운 레퀴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