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덕, 내 안의 질서를 가꾸는 힘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by 박웅

우리는 모두 행복을 원한다.

하지만 막상 ‘행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부와 성공을, 누군가는 인정과 사랑을 말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어떤 대답도 오래가지 않는다. 행복은 손에 쥐려는 순간 흩어지고, 채워졌다고 믿은 만족은 곧 결핍으로 돌아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인간의 추구를 오래된 착각이라 했다. 그에게 행복은 결과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었다. 그것은 소유의 만족이 아니라, 영혼이 살아 움직이는 상태였다.

“인간 삶의 목적은 행복이다. 행복은 감정이 아니라, 영혼의 활동이다.”


행복은 인간이 추구하는 최종의 목적이다. 돈과 명예, 사랑과 성공은 모두 그 길 위의 도구일 뿐이다. 행복만이 그 자체로 충분하다. 그는 인간의 행복을 이성적 활동의 탁월함, 즉 미덕(美德, arete)에서 찾았다.


그가 말한 미덕은 도덕 교과서에 적힌 선행의 목록이 아니다. 미덕은 감정도, 능력도 아니다. 삶 속에서 반복된 선택으로 길러지는 성품(性品, hexis)이다.


분노를 느낄 때, 그 분노를 어떻게 다스리는가. 욕망이 일어날 때, 그 욕망을 어떻게 조율하는가. 그 선택이 쌓여 성품이 되고, 성품은 결국 우리를 ‘좋은 선택’으로 이끈다.


미덕은 감정과 욕망을 억누르는 통제가 아니라, 감정과 욕망이 이성에 자연스럽게 따르는 내면의 질서다. 미덕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과 훈련 속에서 조금씩 길러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미덕은 모자람과 지나침 사이의 중간이다.”


그 중간은 단순한 절반이 아니다. 비겁함과 무모함 사이에서 용기를, 무감각과 무절제 사이에서 절제를 세운다. 중용(中庸)은 매 순간 현실 속에서 이성이 찾아내는 적절함이다.


그에게 중용은 수학적 평균이 아니라 도덕적 감각이었다. 그 감각이 바로 선(善)의 감각이며, 그 감각이 훈련될 때, 우리는 조금씩 ‘좋은 사람’이 되어간다.


행복은 그런 성품이 만들어내는 조화다. 무언가를 이루었기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좋은 성품으로 살아가기에 행복한 것이다. 결국, 행복은 감정의 보상이 아니라, 삶이 잘 작동하고 있다는 내면의 조화다.


미덕을 닦는 일은 거창하지 않다. 오늘의 작은 선택 속에서, 내가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조금 더 나은 판단을 하는 것. 그것이 곧 자기 안의 선(善)을 단련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단련에는 끝이 없다. 우리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선(善)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속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묻는다.

“너는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그 물음 앞에 나는 잠시 멈춰 선다. 그 질문은 나에게 이렇게 들린다.

“너는 지금, 행복을 실천하고 있는가?”


이제 조금은 알겠다.

행복이란 도착이 아니라 과정이며, 삶을 살아내는 방식이라는 것을.


행복은 멈춰 있는 고요가 아니라, 선을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 그 자체라는 걸.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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