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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mi Lee Oct 26. 2018

내가 나를 키우는 데 허리가 휜다

 한 달 생활비는 늘 빠듯했다. 버는 게 신통치 않을 때도, 여유가 좀 생겼을 때도, 지갑은 언제나 목마르다. 내가 나 하나 데리고 사는데 이렇게 많은 돈이 들 지 몰랐다. 벌면 버는 대로 그만큼의 지출이 생긴다. 나이가 들수록 필요한 것이 기하급수적으로 생기고 돈 들어가야 할 곳도 늘어난다. 아끼고 안 쓰던 사회 초창기 시절에, 어떻게 그렇게 지출 0원을 목표로 살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나 혼자서도 씀씀이를 줄이는 게 쉽지 않은데 먹여 살릴 식구가 생긴다면 어떻게 감당을 할까? 나는 부모님의 울타리 안에서 살며 참 철없이 태평했다.     


 10대 시절,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 생각했고, 공부하는 데 드는 돈은 하나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교육비 이야기가 미디어에서 나오면 내 주머니에서 지출하는 비용이 아니라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입시학원은 기본이고, 교양을 쌓아야 하니 악기 하나쯤, 체력도 중요하니 체육관도 꾸준히 다녔다. 초등학생 때도 아니었고 고등학생 때였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연주회가 있으면 예쁜 드레스를 빌려 입고 참가를 했고 운동을 하며 전국 곳곳으로 크고 작은 대회도 빠지지 않고 꼬박 나갔다. 방학 때는 중국으로 전지훈련을 보내 달라고 떼를 썼다. 인터넷 서점이 나오고부터는 할인을 많이 해주니 매달 10만 원어치씩 책을 사 봐서 늘 플래티넘 회원을 달고 살았다. 이것이 끝이면 좋은데 어학공부를 해야 하니 전자사전을 사달라고 했고 동영상 강의를 들어야 하니 PMP를 사 내놓으라고 했다. 그 와중에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서 샀던 비디오카메라와 사진작가가 되고 싶으니 DSLR 카메라도 아까운 줄 모르고 산 것은 어쩔 것인가. 나는 어마 무시한 돈을 부모님께 갈취하며 내 욕심을 다 채우고 산 것이다. 매달, ‘엄마, 전자사전 사줘, 30만 원.’ ‘엄마, 대회 나가야 해 30만 원’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나 혼자 그런 것도 아니고 동생까지 둘이서 1인 1 기기를 탐냈으니 아빠 회사 월급으로만 감당이 되었겠는가. 결국 우리가 아빠 엄마를 일터로 내 몬 것이다. 때로 주머니 사정이 궁한 때도 있었을 텐데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하고 싶다는 것은 다 마련해 주셨다. 그런데 무슨 큰 빚을 지셨길래 부모님은 자꾸만 못 해줘서 미안하다고만 하지?    

 

 이제 나는 이렇게 못 산다. 나를 위한 사교육비로 한 달에 수십만 원에서 기백만원씩 쓰자고? 내가 돈을 벌어보니 손이 떨려서 선뜻 뭔가를 시작하지 못하겠다. 어학학원 하나 다니고 체육관 한 군데 다니면 한 달 학원비가 벌써 30만 원이다. 그러면 솔직히 흔들린다. 학원 다니는 대신 한 달에 삼십만 원어치 옷을 사 입는다면 몇 벌? 야심 차게 학원 등록을 했다가도 사정이 나빠지면 다음 달 등록을 고민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부모님이 보내준 학원보다 출석률이 훨씬 들쭉날쭉하다. 하지만 어릴 적, 집안 사정이 어렵다고 학원을 끊어야 할 위기가 왔을 때는 얼마나 서럽던지... 그래서 학원 운영에도, 성인부보다는 학생부가 훨씬 더 안정적이고 활발하게 돌아가는 것임에 분명하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는 기꺼이 본인의 등골을 자식들의 교양과 지식으로 바꾸길 원하나 보다.  

   

  생각해 보면 어릴 적부터 나는 거의 부족한 것 없이 다 누렸다. 아빠는 최선을 다해 아빠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하셨고 물심양면으로 딸들의 ‘니즈’를 충족시켜 주셨다. 나는  부모님보다 더 많은 지원을 받고 부모님보다 더 많은 교육을 받았는데 부모님보다 잘 살지 못한 것이 어떻게 내 탓이 아닌 남 탓, 사회 탓 일까. 내가 못 살겠다고 볼멘소리 하면 부모님 억장만 무너진다. 부모님이 받은 교육과는 차원이 다르게 애지중지 키운 아이들이 먹고살기 힘들다며 다시 부모님 품으로 돌아오는 캥거루족이 되었는데, 이를 지켜보는 부모님은, 자식 탓이 아니라 사회 탓이고, 좋은 사회를 만들어 주지 못한 기성세대 탓이라며 또다시 본인이 짐을 짊어지려 하신다. 모르긴 몰라도 어린 우리들은 ‘너는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네가 우리 집 희망’이라고, 기분 좋은 기대를 받으며, 저마다의 희망을 갖고 키우셨을 텐데 말이다.     


 아빠가 나보다 나은 조건이 단 한순간이라도 있었던가. 옛날 사람들이 살기 편했다고 하는 것도 일부일 뿐이다. 어떤 아빠들은 정말 대학 나와서 편편대로를 달려 노후 보장받고 사는 것이 어쩌면 우리 세대들보다 나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어떤 아빠들은 위로는 부모님을 모시고, 끝없는 자식들 뒷바라지에, 나이 들어서도 돈 천 원에 고민하며 살아간다. 우리 부모님들의 인생을 생각해 보자. 아빠에겐 물론 안정된 직장이 있었다. 아빠는 운이 좋게도 정년퇴직을 하셨지만 아빠의 동료 중 절반 이상은 명예퇴직을 하셨다. 아빠는 직장이 있었지만 이걸로 먹고살 것인가 잠이 오지 않은 날들이 여러 날들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와 함께 여러 사업을 고민했다. 꼬치 집도했고, 노래방도 했고, 슈퍼도 했다. 아빠가 투잡을 벌일 때마다 이모들의 원성을 사야겠다. 우리 언니 고생 좀 그만 시키라는 것이었다. 아빠 엄마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셨다. 그래서 월세가 나오는 상가건물을 살 수 있었고 노후를 월세 받고 살게 되셨다. 아빠를 부러워하는 아빠 친구들에게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우리 아빠 진짜 열심히 사셨다고. 잘 살았던 아빠에게 물어보라. 어느 누가 순탄하게 살았는지를. 그렇게 보이는 아빠들은 단지, 우아하게 보이지만 미친 듯이 발길질을 하는 백조와 같을 뿐이다.     


 사실 아빠들이 분명 더 어려웠을 텐데, 아들 딸들 보고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았을 텐데. 누가 자식들 염장 지르고 싶어 잔소리하겠는가. 삶의 지혜 한쪽이라도 나눠주고 싶어 하는 말일 텐데. 한 마디에 파르르 떨며 반박하는 목소리 때문에, 아빠들이 자신의 목소리마저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이렇게 나 하나 먹여 살리기 힘든 세상에, 그런 악조건이 겹겹이 겹친 상황 속에서 힘들다 말 한마디 못하고 여린 딸 둘을 세상에 내놓은 아빠께 경의를 표한다. 이 시대의 아빠들은 다 이렇게 멋진 분들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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