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Hyemi Lee Nov 30. 2022

나쁜 생각을 막아 버리는 엄마의 화법

 나는 과연 평생 부모님이 좋기만 했을까?

 살다 보면 부모님이 나에게 잘못을 하기도 하고, 돌연 어릴 적 엄마가 나를 서운하게 했던 일이 생각나기도 하고. 가끔 엄마한테 하소연도 하고 투닥투닥 거리다가 또 이내 풀고. 그렇게 살아간다.

 보통 부모님에게 서운한 일을 이야기하면, 엄마들은 어떻게 대답을 할까? 요즘 부모님들은 따뜻하게 ‘그래,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하고 드라마 대사처럼 사과할까? 그런데 내가 이래저래 투덜거릴 때면 우리 엄마는 늘 한결같이 대답했다.

 “야, 그런걸 뭐하러 기억하냐? 잊어버려.”

 미안하다는 일언반구도 없이, 뻔뻔하게 그냥 ‘잊어버려라’고 얘기했다. 애교 섞인 목소리로. 그리고 급히 화제를 딴데로 돌린다. 그럼 우리는 다른 웃긴 이야기로 돌아가서 다시 깔깔거리며 웃는다.

 하지만 엄마가 그냥 웃어 넘기고 잊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한 번 서운하디고 이야기 한 것은 두 번 서운하게 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실은 엄마는 표현하진 않았어도, 내가 무심결에 한 이야기 때문에 그 날 밤 잠 못 이루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여동생과 6살 차이가 나기 때문에 차별 아닌 차별을 많이 받았다. 동생이 너무 아기였기 때문에, 내가 7살 되던 해부터 쭉 어른스러운 모습을 기대받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내가 동생을 잘 돌보는 아주 큰 아이라고 생각을 했고, 집에 있는 가장 좋은 것이 동생에게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 번은 초등학생인 나에게 공부하라며 내방 문을 닫아두고, 동생과 엄마만 맛있는 꽃게 살을 빼먹던 것을 발견한 적이 있다. 그 때 내가 아홉 살쯤 되었나, 너무 어릴 적이라 기억에 안 날 법도 한데 서운한 건 기억에 오래 남는 법인지. 아직도 엄마가 안방에서 노란 쟁반에 꽃게를 담아 동생만 먹이던 장면이 생각 난다. 그 얘기를 했을 때도 엄마는 예의 그 태평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 나쁜 기억은 잊어버려라.”

 엄마는 그런 적이 없었던 것 같다며,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오리발도 내밀었다.

 그렇지만 20대가 된 내가 어릴 적 이야기를 끄집어내며 엄마를 몇 번 괴롭힌 후, 언제부턴가 엄마는 웬만해선 내 편을 들어 주었다. 동생이 없을 땐 뒤에서 나와 함께 동생 흉도 실컷 함께 봐 주고, 삼자대면을 해야 할 때에는 묘하게 중립을 지켜주고 말이다. 언젠가 엄마는, 엄마의 친구 이야기를 빗대며 에둘러 말한 적이 있다. 친구가 그랬다고. 첫 딸은 크면 클수록 마음 아프고 못 해준 것이 미안하다고. 꼭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속사정이야 어떨 지 모르겠지만, 꽃게 한 조각도 나에게 나누어주지 않았던 엄마가 나에게 얼마나 미안했을까? 낯뜨거운 말은 못하는 무뚝뚝한 경상도 성향의 엄마라 아마 평생 나에게 곧이곧대로 말하진 못할 테다. 그렇지만 늘 그렇듯 엄마는 나에게 밝고 즐겁게 풀어서 표현 할 것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좋은 일이 없어도 웃고 다녔다. 나는 내가 웃고 다니는 줄 몰랐다. 밝은 아이라는 것도 사람들을 통해 알았다. 의도하지 않은 나의 밝음은 엄마의 밝고 경쾌한 모습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 같다. 유전적으로 물려받기도 했겠지만, 엄마의 평소 모습을 보며 거울처럼 닮아가기도 했을 것이다.

 엄마는 내가 슬프거나 우울한 내용의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저런 건 보지 말아라’ 사건 사고가 생겼다는 뉴스를 보면 ‘저런 일은 평생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 심지어 세상에서 제일 재밌다는 싸움구경나, 불구경이 눈 앞에 생겨도, 다른 쪽으로 우릴 끌고 가며 ‘저런 걸 보면 뭐하니’ 했다. 엄마는 늘, 좋은 것, 밝은 것, 즐거운 것만 보여주었다. 평생 엄마에게 그러길 강요당해오던 나는 그래서 늘 좋았던 것 같다. 나의 장르는 항상 코미디에 해피엔딩이었다. 무슨 일을 닥치든 긍정적으로 생각했고 즐겁게 살았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면 일어나라’, 하고 해결했고, 벅차 보이는 목표도, 누군가는 해내는데 왜 나는 하면 안되냐며 될 줄 알고 도전하며 살았다. 엄마에게 물려받은 가장 좋은 것이 바로 이 긍정적인 마인드와 삶에 대한 밝은 자세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엄마가 부잣집 딸이어서 마음이 풍요로웠던 것도 아니었고, 평생 엄마의 삶이 녹록했던 것도 아니었다. 평범한 직장인이던 아빠는 젊을 때부터 노후에 대한 걱정과 준비를 했다. 할머니를 평생 부양했던 아빠는, 자식들에게는 그런 부담을 주지 않을 거라며 엄마와 둘이 고민을 아주 많이했다.

 사는 것에 무척 치인 어느 날, 아빠는 엄마와 함께 공원에 나가 솜사탕 장사를 바라보며, 엄마에게 주말에 솜사탕 장사라도 해야겠다고 말했다. 엄마는, 기계가 준비되면 평일엔 엄마가 나가서 팔겠다고 말했다. 아빠는 엄마의 그 말이 무척 고마웠다고 했다. 대부분의 엄마들이 가정주부였던 시절이었지만, 엄마는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결국 우리 집은 작은 동네 슈퍼를 시작하게 되었고, 20년 동안 엄마는 그 작은 슈퍼를 본인의 놀이터 삼아 신나게 일을 했다. 내가 슈퍼 일을 적지 않게 도와서 아는데, 그 일이 마냥 신날 리가 없다. 별별 손님들이 와서 시비를 걸어도 허허 웃고 넘어간 것은 엄마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살다 보면 많은 스승을 만나게 된다. 그 중 우리 부모님과 같은 스승을 만난 것은 평생의 재산이 분명하다.

 아빠에게는 지치지 않고 열심히 사는 삶의 자세를, 엄마에게는 긍정적이고 밝게 사는 삶의 태도를 배웠으니, 아마도 나는 이제 더이상 부모님에게 받아야 할 것이 없다. 







작가의 이전글 나를 위한 엄마의 기도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