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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mi Lee Dec 17. 2022

아빠 잠바를 하나 사 드렸다


 아빠는 패션에 민감한 사람이다.

 머리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날은 장난으로라도 사진을 절대 안 찍는다. 옷을 좋아해서 아빠 전용 옷장을 따로 쓰는데, 옷장의 잘 다려진 옷이 수십 벌이고 거의가 드라이클리닝을 해야 하는 옷들이라 한 달 세탁비도 만만찮게 든다. 언젠가 한 번은 아빠 생일을 맞아 쇼핑을 하다가, 엄마가 정장 두 벌을 한꺼번에 사 주었다고 한다. 아빠는 그날 너무 기분이 좋아서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고 했다. 외꺼풀인 아빠는 20년 전에 쌍꺼풀 수술도 했다. 안검하수 수술도 유행하기 전이었는데, 집안의 가장 큰 집 형님이었던 아빠가 쌍꺼풀 수술을 해 오자 온 집안이 쑥덕거린 적도 있다.


 옷을 좋아하는 아빠에게, 내가 사회생활하고 돈을 벌기 시작한 후 처음으로 겨울철 잠바를 하나 사 드렸다. 2010년대 초반, 브랜드 패딩이 꽤 비쌀 때였고, 어른들도 하나쯤 탐을 내던 때였다. 원체 옷을 좋아해서, 새 옷 한 벌이 그냥 생겨도 기분 좋아하는데 딸이 사다 준 잠바를 얼마나 입이 부르트도록 자랑을 하며 입고 다녔는지 모른다. 엄마는 민망해서 어디 나갈 때마다 ‘혜미가 사줬다고 그만 좀 자랑하고. 알았지?’ 라며 아빠를 단도리 했으나 사람 셋 이상 모인 자리면 어김없이 딸내미가 벌써 커서 내 옷을 사 주었다며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 행세를 하고 다녔다는 엄마의 후문이다.     


 나에게도 자랑할만한, 아빠가 사 준 물건들이 많다. 독립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 내 집에는 아빠가 사 준 물건들이 많다. 내가 밤에 글을 쓸 때 사용하는 탁상용 스탠드는 13살,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에 아빠가 사 준 것이다. 어린 시절, 처음으로 써 본 스탠드가 신기해서 매일 밤 스탠드를 켜놓고 다이어리를 끼적거렸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고, 10년 후에는 내가 어떻게 변해있을지 줄기차게 써댔던 것 같다. 스탠드는 30년이 다 되도록 나와 함께 중국 유학도 다녀오고, 이사를 다니며 모서리 여기저기가 깨지긴 했지만, 여전히 적당한 밝기의 조명이 잘 나와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도 없는 물건이다.

 내 책상 가장 아래 서랍에는 아직 버리지 못한 전자사전과 PMP가 있다. 중국 유학 시절, 전자사전은 HSK 중국어 시험공부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PMP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 보자고 산 건데, 나는 프리즌 브레이크나 가십걸을 다운받아 보느라 시험에 떨어졌고 PMP의 유행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버렸는데 아직도 충전을 하면 쌩쌩하게 돌아가는 기계라 쉽게 버릴 수가 없다. 내가 웬만하면 안 쓰는 물건은 중고로 처분해 버리거나 미련 없이 버리는 걸로 유명한데, 당시 회사도 다니며 슈퍼를 운영하던 아빠 엄마의 고생과 바꾼 물건들이라 쉽게 버려지지가 않는다.

 또 하나는 내가 고3 때 아빠가 사준 8mm 캠코더다. 이것이야말로 유물이고 이제는 어디서 8mm 테이프를 구할 수도 없고 심지어 이 제품은 컴퓨터와 호환할 수 있는 USB 단자 하나 없다. 티비나 비디오와 연결해서 겨우 볼 수 있는 제품이지만 버릴 수 없었다. 어린 내가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며, 청소년 단편영화제에 작품 한 번 내 보겠다고 설쳤기 때문에 아빠가 거금을 내고 사 준 것이다. 아빠는 공부 안 하는 딸이 혹시 영화감독이라도 되는 것 아닌가 하고 기대했을까? 창원의 대동백화점에서 그때 당시 가격이 78만 원 정도 했던 걸로 아직 기억한다. 지금도 78만 원이면 적은 금액이 아닌데 당시 체감하는 금액이 얼마나 컸을지 모르겠다.

 내가 탐했던 모든 물건이 이제는 휴대폰 하나로 해결이 된다. 8mm 캠코더로 어두운 밤 촬영이 잘 안 돼서 고생하고, 편집실의 편집 프로그램이 없으면 영상 편집이 안 되어 쩔쩔매던 나는 이제 아이폰으로 색 보정을 해가며 영상을 찍고선 앱으로 손쉽게 편집을 한다. 그렇게 찍은 영상으로 우리 회사 제품을 홍보하고, 어릴 적 배워 놓은 중국어로 중국과 거래를 한다. 아빠가 차곡차곡 피땀 흘려 벌어준 돈으로 먹고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삼 년 간 아빠에게 겨울맞이 선물을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했다. 사실 크리스마스가 아빠와 엄마의 결혼기념일이기 때문에 늘 가장 성대하게 챙겼고 겨울선물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그렇지만 회사가 어려워 어떨 땐 급여를 빠듯하게 출금할 수밖에 없었다. 사업을 한 이후로 한 번도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었는데 이번엔 우리도 코로나 타격을 받았던 것이다. 급여를 핑계 삼아 몇 년째 부모님 신경을 못 썼다. 그러니까 아빠 잠바 한 벌 정도 사 준다고 가계에 구멍이 나는 것도 아닌데 난 뭐 그리 인색했던 걸까. 그래서 결국 올해는 잠바 한 벌씩 사 드리기로 했다. 아마 며칠만 지나면 나는 잔고의 금액 따위야 잊고 살 것이다.


 엄마에게 송금을 한 후 메시지를 보냈다. 올 겨울은 매서우니 아빠와 롱 패딩 하나씩 사 입으라고. 엄마는 뭐하러 보내냐며 손사래를 쳤지만, 이미 새 패딩을 한 벌씩 장만했다며, 주는 돈은 모아놓겠다고 했다. 나는 그러지 말고 갖고 싶은 거 사고, 아빠도 가지고 싶은 것 하나 사 주라고 했다. 엄마는 안된다고 했다. 그리고 나보고 아빠에게 용돈 얘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당장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곧 결혼기념일인데 뭐 갖고 싶은 거 없어요? 롱 패딩 하나 사주고 싶었는데 엄마가 얼마 전에 샀다고 하더라고요.”

 아빠는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 네 사업하는 데 보태 쓰라며 받기를 마다했다. 옆에서는 자꾸 엄마가 뭐라 뭐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제가 엄마한테 용돈 부쳐 놓았는데요, 아빠 안 나눠준대요.”

 그리고 뭐라고 얘기 한 지 기억이 안 난다. 아빠는 용돈의 절반을 내놓으라고 엄마한테 달려든 것 같고, 엄마는 배꼽이 빠져라 웃었고, 아수라 상태에서 전화가 끊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아빠에게 정확히 절반을 송금한 내역을 캡처해서 나에게 보내주었다. 아빠와 엄마는 용돈만 주면 싸운다. 참 아름다운 집안이다.     


 효도는 나무를 가꾸는 것과 같다. 늘 옆에 서 있어서 존재감이 없을 수도 있는데, 신경 쓰면 잘 보이고 훨씬 더 잘 키울 수 있고, 아차 하면 시들시들 해질 수도 있고, 깜빡하고 꽃 피울 시기를 지나칠 수도 있고. 내가 돌보지 않았는데 혼자 꽃을 틔여 신기하기도 하고. 혹, 신경을 놓고 있다가 나중에 가장 손해 보는 사람은 후회할 나 자신일 것이다. 글을 쓰며 통장 잔고가 한번 더 상기되긴 했지만 그 역시 내일이면 잊힐 것이다.

 내년에는 일도 더 잘하고 부모님께도 더 잘해야겠다. 아빠는 나에게 줘도 줘도 모자란 것 같다고 하는데, 그 마음은 나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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