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깨워드림

생존기록- 평범하다고 믿었던, 여러 하루 중의 하루

Surviving

by 파도


아침 6시. 아이가 우는 소리에 깼다. 밤새 열이 나는 아이 옆에서 기저귀를 확인했는데 아직 뽀송뽀송했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분유를 타서 아직 태어난 지 두 달도 안된 아이에게 젖병을 물렸다.


태어난 지 2주도 안 돼 고열에 시달려 중환자실에 입원했던 둘째 딸이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기 전, 나는 밤새 열이 나는 아이의 몸을 물을 짜낸 물수건으로 닦아내며 열이 내리기만을 기도했다. 밤새 정말 한숨도 못 잤지만,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노심초사하며, 아침에 병원 문이 열리자마자 아이를 데리고 갈 때까지 아이가 잘 버텨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중환자실에 있는 아이는 하루에 단 한 번 30분 밖에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다. 아내는 정성껏 모유를 유착해서 아이에게 먹이기 위해 면회 시간에 가져다주곤 했다. 다행히 아이는 2주 정도 병원에서 지내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태어나서 우리와 함께 한 시간과 병원에 있던 시간이 거의 같았던 것이다. 이제는 아이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다.


하루 종일 회사에서 일에 시달리다가 집에 돌아와서 아이를 돌봤다. 하루 종일 육아에 시달려 지친 아내가 그나마 잠깐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출산한 지 두 달도 안 된 아내의 몸은 아직도 회복이 필요했다. 대출이 절반이 훨씬 넘는 방 두 개짜리 오피스텔에서 우리 네 가족은, 엄마 아빠가 처음이었고 아기들도 처음인, 모두가 세상에서 간신히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한국 나이로 서른한 살 아빠, 서른 살 엄마, 두 살 아기, 한 살 갓난아기가 다 같이 뒤뚱뒤뚱 하나의 가족이 되어 살아갔다.


몸도 마음도 피곤했지만, 어쩌다 아이들이 일찍 잠들면 같이 일찍 잠들 만도 한데, 아이들이 잠들면 맥주라도 한 잔 하면서 TV를 보며 놀다 자고 싶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 건물 1층에는 상가가 많아서 편의점이나 치킨집, 생맥주를 먹을 수 있는 곳이 많았다. 우리는 가끔 아이들이 잠들면 맥주와 편의점 안주를 사다 놓고, 서로의 하루 고충을 들어주며 서로를 응원하고, 우리를 응원했다.


자고 일어났을 때 아주 상쾌하게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항상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두 아이의 엄마 아빠였지만, 우리는 아직 서른 초반이었다. 친구들은 아직 결혼하지 않았거나 결혼했어도 신혼을 즐기며 여행도 다니고 취미생활도 하고 행복해 보였다. 우리의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부러운 마음은 왜 없었을까. 그래도 후회는 없었고, 너무나 천사 같은 아기들의 미소를 보면서 “그래도 내가 이 때문에 산다”라고 생각했다. 내가 힘들다고 하면 이 천사 같은 아기들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아빠고, 남편이고, 가장이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지하철을 탔다. 서울 변두리 끄트머리 동네에 있는 집에서 사무실이 있는 강남까지는 버스와 지하철을 섞어 타서 1시간 반 정도 걸렸다. 지하철에는 모두가 힘들어 보였다. 나보다 더 먼 곳에서 지하철을 타고 오는 사람들을 보면, 그나마 나는 좀 더 가깝다는 미묘한 위로감을 느끼기도 했다.

매일 전투복처럼 입는 나의 옷, 거의 교복처럼 군복처럼 입고 집을 나섰다. 엄마가 생일 선물로 구두 상품권을 주셔서 오래간만에 괜찮은 구두를 하나 샀다. 멋진 구두지만 발은 불편했다. 하지만 직장인은 원래 그런 거니까, 전투화처럼 신고 구두에 내 발을 맞춰 신고 오늘도 전투 현장에 나선다. 좋은 구두 한 켤레로 온 사방을 돌아다니니 금방 닳고, 가죽에 주름도 졌다. 그래도 좋은 구두니까, 구두가 닳고 주름져도 내 삶이 닳고 주름지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침 아홉 시가 되면 간신히 아슬아슬하게 출근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회사에서 나는 젊은 축에 속했다. 나를 제외한 팀의 모든 사람들은 회사 가까운 강남 지역에 살았다. 팀의 상무님은 돈을 많이 버실 테니까 서초동, 부모님이 부자인 부장님은 삼성동, 아직 결혼 안 한 과장님은 부모님과 함께 역삼동, 집에서 지원을 받아 해외유학을 다녀온 팀의 막내 사원도 방배동에 살았다.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벌써 진이 빠지고 땀도 난 나에 비해 왠지 뽀송뽀송한 차림의 팀 동료들을 보며 출근하면서 이미 하루의 에너지를 모두 소비한 나는 팀의 동료들이 부럽기만 했다.


‘Even the morning seemed tired, it has just only begun.

아침은 피곤해 보였지만,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대학생 때 읽었던 ‘매디슨카운티의 다리’라는 미국 소설에서 나온 한 구절이 종종 생각났다.


하루의 출발부터 다르지만, 일의 성과에서 뒤처질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우리 가족을 대표해서 회사에 나왔기 때문이다. 아내는 유명 대기업에서 잘 나가는 팀에 근무했지만 첫째와 둘째 출산을 하며 2년 넘게 휴직 중이고 퇴사를 고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대표로 경제활동을 하고 있었다. 빠듯한 살림이었지만 아껴가며 잘 살아주는 아내가 고마웠다.


출근하자마자 팀 회의가 소집됐다. 일할 시간도 없이 팀 회의는 계속됐다. 이렇게 회의를 길게 하면 일은 언제 하나. 오전 시간은 거의 팀 회의만 하다 끝났다. 팀 회의의 절반은 팀 리더의 잔소리였다. 공포스러운 분위기 속에 한 사람 한 사람씩 돌아가며 혼나는 분위기. 내 차례가 돌아오지 않기만을 기다리며, 뭐가 잘못됐는지도 모르면서 연신 “죄송합니다”만 반복했다.


회의가 끝나면 점심시간. 팀원들과 식당을 찾아 헤매지만, 고민 없이 값싸게 먹을 수 있는 곳으로 간다. 점심 식사 자리에서도 말이 없다. 그냥 꾸역꾸역 음식을 삼킨다. 식사 후에는 토끼굴 같은 골목에서 담배를 피운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는 그 옆에서 얘기를 들어주며 같이 푸념을 늘어놓는다. 담배연기로 가득한 골목은 마치 직장인들의 푸념이 흩어지는 듯했다.


오후에는 오전 미팅에서 나온 업무를 처리한다. 그때 팀 리더가 나를 불러 회의실로 들어갔다. 거래처 담당 바이어에게 불만을 전달하고 올해는 정리하라는 내용이었다. 맞는 말이지만 그런 내용을 직접 전달하면 거래처 관계는 무너진다. 결국 문제 생기면 나의 결정으로 몰아가고, 회사는 다른 담당자를 보내 관계를 회복하겠지. 알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게 회사에서 나에게 기대하는 역할이니까.


주 내내 이 문제로 시간을 보냈다. 이전 이메일까지 거의 내용증명 수준으로 정리해 전달했다. 거래처의 부당행위는 명백했지만, 업계에서는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거래처 사무실이 아닌 커피숍에서 만난 바이어는 내가 무슨 얘기를 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나이가 많은 선배 바이어는 나에게 쌍욕을 했다. 나도 화가 났지만, “왜 화를 내고 욕을 하십니까?”라고 맞섰다. 더 격앙된 목소리로 뭐라고 했지만, 내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내가 틀린 말을 했냐, 이게 합당한 요구냐”라며 회사의 입장을 끝까지 고수했다. 예상대로 거래처 관계는 악화됐다. 회사에 돌아와 내용을 보고하자 다음 미션은 당연히 “관계를 잘 풀어보라”였다. 어이가 없었지만 예상된 수순. 팀 리더가 나서 부드럽게 분위기를 풀고 회사 이미지를 챙기는 방식이었다. 더럽고 치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함께 미팅에 나왔던 어린 바이어가 따로 전화를 걸어왔다. 자기 선배가 그렇게 욕을 한 것이 부끄럽다고, 대신 사과드린다고 했다. 그 말만으로도 위로가 됐다.


어느새 퇴근 시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야근을 위한 저녁을 먹으러 갔고, 나도 자연스럽게 따라갔다.

여섯 시가 되자 아내에게서 “여보, 퇴근 언제 해?”라는 문자가 왔다.

나도 집에 가고 싶지만, 육아에 지친 아내가 나의 퇴근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미안해, 오늘 야근 때문에 조금 늦을 것 같아”라고 답했다.


회사에서도, 거래처에서도, 아내에게도 나는 늘 사과만 하고 있었다.


명절이 다가오는데 부모님께 드릴 선물도 고민이었다. 대출이자, 산후도우미 비용까지 돈 나갈 곳이 많았다. 빠르게 저녁을 먹고 일을 시작했다. “1시간만 하고 가야지.” 하지만 그 1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아내에게 집에 간다고 말한 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팀원들은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고, 조금 전 팀 리더가 집에 갔다. 나도 일어나려 했지만 눈치가 보여 조금 더 앉아 있었다. ‘에이 모르겠다.’하는 생각에, 그냥 일어나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하자, 다들 놀란 듯이 “어, 그래 잘 가라”라고 인사했다. 그들도 곧 하나둘씩 따라 일어났다.

아내에게 “지금 출발한다”라고 보냈다. 답이 없었다. 잠들었거나 아이를 챙기고 있겠지. 집에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맥주를 몇 개 샀다. 늘 500ml 캔. 치킨집에서 치킨도 사고 싶었지만 마지막 남은 양심이 “그렇게 먹어서 되겠냐”라고 속삭였다. 그냥 과자 한 봉지 사서 들어갔다. 아내가 문자를 보냈다. “지금 아이가 잠들 것 같으니 조금 있다가 들어와.” 나는 잠깐 집 앞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바라봤다. 치킨과 맥주를 즐기는 사람들, 쇼핑하고 들어가는 사람들. 다들 즐거워 보였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저렇게 살았는데, 별거 아닌 즐거움이었는데 아는 즐거움이니까 더 부러웠다. 언제 다시 저런 시간을 즐길 수 있을까? 왠지 다시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다시 9시간 뒤면 나는 출근하고 있을 것이다. 내일도 오늘과 똑같다. 하루는 반복되고 나는 소모되지만, 뚜렷한 목적은 있다. 우리 가족의 생활비 벌기, 대출금 갚기. 그게 전부였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힘든 시간이었지만, 다들 이렇게 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냥 버텼다.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고, 나아지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아니, 당연히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삶에 ‘나’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루하루 살다 보면 언제 가는 괜찮아지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그냥 하루 하루 버티며 살다보니 '생존(Surviving)'에 가까운 삶이었고, 그 생존마저도 위협받는 순간이 오게되었던 것이다. 나는 얼마 못가 뇌수막염이라는 병에 걸렸고, 건강을 잃자 나의 경제력, 능력,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가족의 안정 조차도 위태롭게 되었던 것이다.


--------------------------------------------------------------------


이 글은 제가 생존자에서 벗어나 삶을 주도적으로 살기 위해 나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긴 여정의 시작입니다.

오늘 읽어주신 글은 이전에 올렸던 '프롤로그 (https://brunch.co.kr/@xharleskim/316)' 글의 연장선상에 있는 글입니다.


여러분의 진솔한 의견이 제 글을 더 단단하게 만들 것이라 믿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안전 영역 밖으로 -Outside the boun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