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찐작가 Dec 29. 2021

묵호, 기차가 실어 나르는 바다의 조각

몸도 마음도 풍족해지는 동해 바다마을

묵호를 알게 된 것은 2015년 첫 내일로 때였다.  내일로를 정동진에서 시작하여 2일째 되는 날 일행 중 누군가의 추천으로 들렀던 곳이 묵호였다. 막연히 기차역이 예뻤고, 역무원 분들이 친절하셨고 동해바다와 해산물 맛집이 좋았던 희미한 기억만을 가진 채 묵호를 여행지로 정하게 되었다.


묵호는 서울역에서 KTX로 한 번에 갈 수 있지만 생각만큼 배차가 많지는  않다. 여행 당일 아침 급하게 원서 하나를 쓸 일이 있었다. 그래서 아슬아슬하게 지하철에 탑승했는데, 7호선이 무려 5분 정도 연착하는 바람에 정말 눈앞에서 기차를 놓쳐버렸다. 다음 기차는 거의 3~4시간 후였기 때문에 다른 교통편을 알아봐야 했다. 결국 고속버스로 이동하기로 결정하고 터미널에서 이른 점심을 먹었는데, 주문한 햄버거가 20분 동안 나오지 않아서 5분 만에 햄버거를 흡입하고 감자튀김은 가방에 대충 구겨 넣은 채 버스를 향해 뛰어야 했다. 하마터면 하루에 두 번이나 차를 놓칠 뻔했다. 그래도 버스 간격은 1시간 간격으로 양호한 편이었고, 평일에는 길도 막히지 않아 나름대로 편안하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착한 시간은 벌써 해가 지기 한 시간 전이었다. 묵호항 인근까지 시내버스로 이동하고 도보로 묵호항 수변공원에 갔다. 을 든 채로 걸어서 이동하기 살짝 힘들었지만 짙은 바다와 노을 진 수변공원을 바라보고 있자니 저절로 힐링되고 생각 정리하기에 안성맞춤인 곳 같았다. 다음날 아침에 바라본 동해바다는 뭔가 힘을 주는 느낌, 역동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느낌이었는데 저녁에 본 바다는 조금은 슬픈 느낌이었다.

생각보다 바다 바람이 셌기 때문에 바다가 잘 보이는 해안 카페에서 일몰만 보고 저녁을 먹으러 이동했다. 저녁 5시쯤 되면 어시장에서 각종 게, 해산물을 떨이 가격에 판다는 글을 보았기 때문에 서둘러 가보았는데 조금 늦기도 했고 겨울이라 그런지 대략 20%의 가게만 남고 전부 문을 닫은 후였다. 하지만 그만큼 가격이 정말 저렴했다. 처음 본 가게는 홍게 15마리에 5만 원, 두 번째 본 가게는 7마리에 3만 원이었다. 이렇게 시장에서 게나 회를 구입하고 사장님께 물어보거나, 횟집으로 포장해서 가져가면 찜 값과 상차림비를 내고 먹을 수 있다. 주의해야 할 점이라면 찜비 + 상차림비 + 게딱지 비빔밥 + 게탕을 먹는다면 나머지 비용도 대략 게 값만큼 나온다. 집에 가져가서 쪄먹을게 아니라면 (펜션은 대부분 객실 내 게찜 조리는 금지인 것 같다) 총 식사 비용은 게 값 × 2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도 어느 어시장보다도 배 터지게 먹을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묵호의 장점 중 또 하나는 바닷가 코앞에 위치한 숙소가 많다는 점이다. 내가 고른 숙소는 어달 쪽 펜션이었는데 통창으로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이었다. 창문을 닫아도 파도소리가 들렸다. 주위는 조용한 편이었는데 아주 간간히 바닷가에서 커플들이 불꽃놀이 하는 소리가 들렸고 파도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일출과 갈매기

다음날 아침 일출을 보려고 일부러 일찍 일어난 건 아니었지만, 뭔가 바닷가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느낌에 눈을 떴다. 아직 동이 트기 직전이었다. 영하에 가까운 추운 날씨였지만 일출을 담기 위해 카메라를 챙겨 펜션을 나섰다.  어달 앞바다는 해가 정말 크게 떠올랐다. 원래 유명한 일출 명소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다른 사진사 한 분이 삼각대까지 설치해두고 해가 떠오르길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서 추운 겨울날 손이 어는 줄도 모르게 카메라에 일출을 담았다. 매기들도 다들 해를 보러 나온 건지 많이 모여있었다.

숙소 바로 근처에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테라스가 있는 카페가 있어서 카페에서 여유로운 오전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카페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묵호에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생각했다. 번 여행의 묘미는 '무계획과 우연이 주는 즐거움'이었다. 애초에 바다가 보고 싶어 떠난, 숙소와 교통편 외에는 아무런 계획이 없는 여행이었다. 그 와중에 여행 출발부터 기차를 놓치고, 첫날 가고 싶었던 빵집은 조기 마감을 했다. 블로그에서 추천한 어시장의 상점도 일찍 문을 닫았다. 하지만 횟집 옆 골목과 펜션 마당에서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귀여운 고양이들이 튀어나오고, 생각보다 더 저렴한 식당을 찾았다. 우연히 일찍 눈이 떠져서 기대도 못했던 일출을 볼 수도 있었다. 남은 하루도 어떤 우연이 생길지 기대가 됐다. 일단 묵호역으로 가서 밥을 먹고 어제 가지 못했던 빵집을 가보기로 했다.


쫄면 순두부

묵호역 근처에 작지만 평이 좋은 쫄면 순두부 집이 있다고 했다. 에 웃긴 금연 포스터가 붙어있어서 유일한 흡연자 친구에게 보여주었다. 주문하고 만드는 시간이 걸려서인지 음식이 나오기까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가게는 만석이었는데 중간에 들어왔다가 자리가 없어 돌아가는 손님들도 꽤 있는 인기 있는 집이었다. 쫄면 순두부는 서울 순두부찌개처럼 자극적인 맛은 아니었지만 맛있게 건강해지는 맛이었다. 뜨거운 순두부를 후후 불어서 입에 넣으면 여독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서울에 돌아가서도 생각날 것 같았다. 언젠간 이 순두부 맛이 그립다는 이유로 묵호를 다시 찾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순두부찌개 아래쪽에는 쫄면도 많이 들어있어서 생각보다 배가 불렀다. 

쫄면 순두부 한 상

후기를 남기면 작은 선물을 준다고 해서 리뷰도 남겼다. 다른 가게 같으면 그냥 확인만 했을 텐데 사장님이 리뷰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시고 칭찬도 해주시고 고마워하셔서 더 기분이 좋았다. 선물은 강화도 여행을 계기로 좋아하게 된 소창 손수건이었다. 예쁜 종이봉투 안에 편지처럼 접혀 있는 손수건을 받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빵 반찬 도시락

식사를 마치고 드디어 예약해 둔 빵 도시락을 가지러 갔다. '메르시 마마'의 빵 도시락은 명란 마요 와사비 등 5종류의 빵 반찬과 앙버터 등 11여 가지의 빵으로 구성된 도시락이라고 했다. 푸짐한 구성과 빵 반찬에 대한 기대가 컸고 빵 도시락은 처음인지라 궁금해서 여행 첫날부터 먹어보고 싶었다. 묵호항의 옛날 감성과는 대비되는 화려하고 넓은 빵집이었다. 가게에 들어서니 갓 구운 빵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고, 다양한 종류의 빵 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었다. 방금 구워 나온 명란 마요 바게트가 포장대에 있었는데 너무 맛있어 보여서 또 배가 고파지는 것 같았다. 사장님이 어제 아쉽게 예약 실패했다가 재방문한 걸 아셨는지 서비스 빵 하나도  챙겨주셨다. 서울 돌아간 뒤 집에 가서 가족들과 나눠먹었는데 빵 반찬은 20대 입맛을 저격하는 맛, 버터와 나머지 빵 들은 부모님 취향에 딱이었다.

빵 반찬 도시락


끼룩상점

여전히 열차시간까지 시간이 남아서 묵호역에 가서 짐 보관을 하려 했는데 물품보관함이 고장이었다. 대신 관광안내소 직원분이 감사하게도 짐을 맡아주셨다. 5년 전 묵호역 여행 때는 사람이 정말 없던 시절이라 물품보관함도 없었고 역무원분들이 짐 보관을 도와주셨는데,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짐을 맡기고 몸이 가벼워진 상태로 묵호의 소품샵을 가보기로 했다. '끼룩상점'이라는 소품샵을 갔는데, 가게가 너무 예뻤다. 햇살이 가득 들어와서 엽서 속의 바다 사진들이 빛나고 있었다. 묵호와 동해 바다가 담긴 엽서, 수첩과 조개껍데기로 만든 세상에 하나뿐인 마그넷을 구입했다. 종이봉투에 예쁘게 포장을 해주시고 스티커도 붙여주셔서 뭔가 선물 받은 느낌이 들었다. (끼룩상점의 캐릭터 갈매기 일러스트도 무척 귀엽다.) 나는 여행 때마다 소품샵에 들러 그 지역을 기억할 물건을 사곤 하는데 내 공간이 여기저기서 가져온 추억들로 채워지는 것이 기분이 좋다.

끼룩상점

 


묵호역 

기차 시간이 다가왔다. 묵호역에는 KTX 외에도 동해바다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바다열차가 정차한다. 코로나 때문에 잠시 운영 중단이 되었었다고 들었는데 다시 운행하고 있었다. 5년 전 내일로 여행 때부터 동해 바다열차를 타는 것이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는데, 이번에도 타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바다열차를 떠나보내고 텅 빈 역에서 사진을 찍었다. 일본의 어느 기차역 같은 고즈넉한 감성이 있는 곳이었다. 경주여행보다도 늦은 계절, 겨울의 초입에 여행을 했는데도 은행나무와 단풍나무의 단풍이 절정을 맞이하고 있었다. 사진가의 입장에서는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햇볕은 따스했고, 역 안은 조용했다. 바다와 가을을 이곳에 두고 떠난다는 것이 아쉬웠다. 묵호는 주변 삼척과 동해에 비해 관광객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바다 풍경만큼은 뒤지지 않는 곳, 물가가 저렴하고 다들 인심이 좋으셔서 몸도 마음도 풍족하게 여행할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하고 싶다. 


묵호역 전경


매거진의 이전글 경주여행 신라의 아침을 맞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