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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버닝(Burning), 2018 > 리뷰

by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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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헝거


영화 버닝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단어는
삶의 의미에 굶주린 사람을

의미하는 '그레이트 헝거'다.

작품 속 캐릭터들은

모두 그레이트 헝거이다.

소설을 쓰고 싶다는 종수

자신이 어떤 종류의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해미의 경우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고 싶다며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난다.

역시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니지만,
일상에서는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비닐하우스를 태울 때만

진정한 희열을 느낀다.

등장인물들이 이렇듯 결핍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버닝은 시작된다.



현실


현실은 반복적으로

등장인물들을 괴롭힌다.
종수는 글을 쓰고 싶어하지만,


아버지 문제, 돈 문제 등으로
자신이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없다.

해미는 팬터마임을 통해

현실에서 벗어나려 한다.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귤이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돼

이 방법을 이용하여 해미는
나름의 자유가 있는 내레이터 모델에
만족감을 느낀다.

현실의 벽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고
현실의 벽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방법을

사용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팬터마임만으로는 가릴 수 없는
현실을 느낀 해미는 아프리카에
그레이트 헝거를 찾으러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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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포

자신의 고양이를 맡아달라는

해미의 부탁에
종수는 해미의 집을 방문하게 된다.

해미의 집은 창에

햇볕이 들지 않는 집이었는데
남산 전망대 유리창에서

햇볕이 반사되었을 때만
집에 햇볕이 들어오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종수와 해미는 사랑을 나누고
종수는 우연히 햇볕이 해미의 집에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장면은 별거 아닌 장면일 수도 있지만
매우 인상 깊은 장면이다.

해미가 아프리카로 떠난 이후에도
종수는 해미가 생각날 때마다

남산타워를 바라보며
해미를 생각한다.

문학적인 표현이 많이 등장하는
이 영화에서 남산타워는

해미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메타포다.



노을

아프리카에 다녀온 해미는

자신이 노을처럼 사라지기를
바랐다고 했다.


어쩌면 그녀가 아프리카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임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후에도 해미는 어떤 일을 하거나

특정한 목표를 두지 않은 채
그저 현재의 삶에 치중하며 살아간다.


이것은 자신의 삶의 의미가

그저 현실을 즐기는 것이라고

느낀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다.





벤의 등장은 종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어린 나이에 포르쉐를 몰고,

좋은 집에 사는 벤을 보며

종수는 '위대한 개츠비'라는 말로 표현했다.

특별한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어디론가 여행을 다니는
그의 인생은 종수의 인생과

너무나도 대비되었다.

포르쉐와 낡은 트럭,

파주와 강남으로 대비되는

상대적 박탈감과,


자신이 갖추지 못한 많은 것을 가

지고 있는 벤과 함께 다니는
해미를 보며 종수는 꿈보다 현실에 더욱 가까워진다.

그는 아버지를 위한

탄원서에 서명을 하러 다니고,
아버지의 변호사를 만나기도 하면서

현실에 안주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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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벤은 해미가 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해미를 좋아한다고 했다.

상류층인 벤은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에서

매력을 느낀다.


실용성이 높은 것을 추구하는

일반 사람들과 달리 그들은
남들이 따라 하지 못하는 것,

특이한 것을 가지고 있느냐를 중요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해미라는 독특한 여자는
벤이 다른 친구들에게 소개할 만큼의
매력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렇듯 벤은 해미가 사라진 이후에도
다른 여자를 자신들의 친구에게
소개하면서 상류층의 미적 가치에 대한
공감대를 공유하고자 한다.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라고 했던
벤의 말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어느 정도 수긍이 되기도 한다.

비닐하우스가 쓸모 있는지 없는지를
벤 이 판단하느냐는 종수의 질문에
벤은 판단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그는 판단하지 않고

단지 받아들인다고 말한다.

그런 것들을 태우는 것은

자연의 도덕과 같고
태워지고 싶어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표현한다.

이 말은 해석이 조금 필요하다.
벤에게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이
장마 기간에 비가 오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다.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느낀다는 것은

윤리적 잣대를 들이댈 수는 있겠지만
미적, 철학적 측면에서는

그 행위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이러한 장면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관객에게 존재에 대한 철학적인 고민을
하게 만드는 점과 유사하다.


해미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해미는

종수와 벤 사이에 있는 인물이다.
종수는 현실에 만족하고자 하다가도
해미를 사랑하게 되면서

이상적인 것을 추구하게 된다.

벤이 좋아하는 일이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일이라고 하자,


종수는 뭔가에 홀린 듯이

비닐하우스 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비닐하우스가 불탄 흔적이 있는지

매일 그곳을 서성거린다.

종수가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비닐하우스를 지키겠다는 마음보다는

자신이 사랑하는 해미라는

사람과 함께 있는 벤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해미가 실종되자

그는 미친 듯 해미를 찾아 나선다.
그에게 해미는 사랑하는 여자인 동시에

자신이 '이상'과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우물

우물 역시 중요한 소재이다.

종수가 해미를 찾아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마을에 우물이 있었는지

묻는 것은 삶의 의미와 관련이 있다.

해미와 함께 지내는 시간 동안

종수는 삶의 의미를
해미를 사랑하는 것에서 찾는다.

해미의 집에서 해미를 생각하고,

해미의 집에 가서 글을 쓰는 모습은

종수에게 해미가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해미가 말한 우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삶의 의미는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우물이 있었냐고 질문을 계속한다.



메타포 2

이렇듯 영화는 거의 막바지로 가고 있다.
이 영화는 메타포가 많이 나온다.
글을 쓰는 작가가 주인공이기도 하고,
삶의 의미라는 철학적인 것이 상징적으로밖에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결국 작품에서 벤이 해미를 죽인 것은

드러나지 않는다.

종수 집 가까이에 있는

비닐하우스를 태웠다거나

벤에게 새로운 여자친구가 생긴 것,

그리고 벤의 화장실 서랍에서
해미의 손목시계가 나온 것 정도가

이를 암시하는 메타포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징들을 바탕으로 종수는
벤이 해미를 죽였다고 판단하고

실제로 그를 죽이게 된다.


이 점에서 볼 때 나는 종수가

벤을 뛰어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다른 상징을 이용하거나

더 세련된 복수를 할 수 있었던
종수는 감정에 휘둘려

1차원적인 복수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종수는 벤이 해미를 죽였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고,
결국 영화에서 팬터마임으로

표상되는 이런저런
상징들에게 속아 그를 죽이고 만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 추구하는
아름답고 세련된 이미지가 아니라
그저 저열하고 단순한 살인일 뿐이었다.

이 점에서 나는 왠지 죽어가는 벤 이
평소에는 느낄 수 없었던 참신한 상황에
묘하게 희열을 느꼈을 것 같다는 상상까지 했다.

결국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에서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었던 종수는
아이러니하게도 윤리적으로 가장 최악의
행동을 해버렸다.

살인을 하고 도망치는 종수의 모습에서
나오는 BGM은 둥둥 둥둥 거리는
베이스 소리이다.

벤은 그전부터 이런 가슴 깊숙이 울림이
있는 행동들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몇 번을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종수는 벤 이 말 한 그 울림을 느끼게 된 것이다.



총정리

드디어 총정리에 들어왔다.
이 영화는 상징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분석을 하려면 소재마다 따로 분석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양이 많다.

그래서 앞서 이것저것 난잡하게
소재들에 대하여

내 생각을 정리해보았는데
그 양이 너무 방대하여

차마 다 적지 못하였다.

이창동 감독은

이 영화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 같다.

세상에는 종수와 같이

소극적으로 꿈을 안고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해미와 같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으며

벤과같이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평가받지만,

실제로는 독특한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모두 나름의 삶의 의미를 찾고

정의 내리며 살아간다.


우리는 그들이 정의내린

삶의 의미에 대해 비난하거나

무시하며 살아가서는 안된다.


물론 비닐하우스 태우기와 같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의
삶의 의미 추구는 제한받아야 마땅하지만
모두에게는 각자의

행복 추구가 보장되어야 함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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